엄마의 팥죽
엄마의 팥죽
  • 추주연 청주교육지원청
  • 승인 2021.01.21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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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추주연 청주교육지원청
추주연 청주교육지원청

 

옆자리 동료가 불쑥 내미는 떡을 엉겁결에 받아들었다.

먹기 좋게 잘라 포장해 놓은 붉은 수수팥떡이다.

손바닥으로 따뜻한 온기가 전해진다. 새해 들어 별관에서 본관으로 이사를 오게 된 부서에서 돌리는 이사 떡이다.

한 입 뚝 떼어 물자 입 안 가득 달금한 팥 향이 퍼진다.

요즘 사람들 취향을 겨냥해 알록달록 예쁘게 만든 떡을 여럿 먹어봤지만 뭐니 뭐니 해도 내 입맛에는 수수팥떡이다.

며칠 전 동짓날 엄마 집에 갔다가 얻어먹은 팥죽이 떠올랐다.

“멥쌀이랑 찹쌀을 불려놓고는 찹쌀 새알심을 빚는다는 게 멥쌀로 만들고, 거꾸로 찹쌀로 팥죽을 쑤었지 뭐냐. 점점 정신이 없어지니 원.” 뱃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으니 괜찮다고 했지만 멥쌀 새알심은 영 쫀득한 맛이 없다며 엄마는 못내 아쉬워하셨다.

일이 한창 바쁜 시기라 먹는 둥 마는 둥 두어 숟가락 뜨고 온 팥죽 생각에 수수팥떡의 마지막 고물을 꼭꼭 눌러 입안에 털어 넣었다.

밤사이 눈이 내리고 극강 한파가 이어진다는 일기 예보에 다른 날보다 퇴근을 서두르는데 큰 길가 붕어빵 포장마차가 참새 방앗간 마냥 눈에 띈다.

꿩 대신 닭이랄까? 종일 눈에 아른거리는 팥죽 대신 붕어빵 한 봉지를 샀다. 기대에 들떠 한 입 베어 물었으나 어째 예전에 먹던 맛이 아니다. 팥죽 생각이 더 간절해져 버렸다.

일기 예보대로 출근길이 꽁꽁 얼어버린 아침, 엄마의 문자가 와있다. `팥죽 할 건데 시간 되면 와.' 예나 지금이나 엄마는 딸내미 속 알아채는데 귀신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엄마는 기다렸단 듯 팥죽 끓인 수고를 토로한다. 맛있는 팥을 사려고 1시간이나 걸어 시장을 다녀오셨단다. 멥쌀과 찹쌀을 헷갈리지 않으려고 불린 그릇을 멀찍이 두고, 팥도 아끼지 않고 넣었다 한다. 엄마의 한나절 사연이 팥죽 속에 몽글몽글 새알심처럼 박혀있다.

그도 그럴 것이 보기엔 쉬워 보여도 팥죽 쑤기란 손 많이 가고 번거로운 일이다.

팥을 씻어 먼저 끓이고 물을 따라버린 후 다시 푹 무르도록 삼는다. 팥이 다 익으면 앙금만 걸러 가라앉혀야 한다. 앙금이 가라앉으면 윗물을 따로 따라내고 그 물에 불린 멥쌀을 넣어 퍼지게 끓인다. 멥쌀이 퍼지면 앙금을 넣어가며 끓이다 찹쌀 새알심을 넣고 새알심이 떠오를 때까지 끓인다. 약한 불에 한참을 끓여야 눋지 않고 색이 곱게 난다. 팥죽 쑤는 내내 곁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엄마의 눈길을 듬뿍 받은 팥죽에 반들반들 붉은 윤기가 흐른다.

옛 사람들은 팥의 붉은색이 액운을 물리친다고 믿고 전염병이 유행할 때도 질병을 물리치기 위해 팥죽을 쑤어 먹었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팥죽 한 그릇과 곁에 낸 동치미 국물까지 싹싹 비우고 나니 속이 든든하다.

엄마가 아니면 어디 가서 요렇게 빛깔 고운 팥죽을 얻어먹을까? 엄마의 팥죽 한 그릇에 코로나도 이제 그만 물러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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