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 혹은 동정과 공감의 사이-이 땅의 어린이와 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하여
연민, 혹은 동정과 공감의 사이-이 땅의 어린이와 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하여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1.01.19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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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내가 살고 있는 도시 청주는 아직 아동학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금 여기'에서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건 아니니 긴장하지 마시라. 다만 지금과 같은 계절, 2011년의 묵은 한 해를 보내고 2012년 새해를 맞아 춘삼월이 되도록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안승아 어린이'사건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부끄럽고 고통스럽지만 <아동학대>가 되풀이될 때마다 이 사건은 감추고 싶은 청주의 역사를 어김없이 소환한다. 당시 4살이었던 `안승아 어린이'는 아동보호시설을 전전하다 집으로 돌아온 뒤, 친모의 학대와 물고문으로 목숨을 잃었다. 숨진 `안승아 어린이'는 진천의 야산에 암매장되었고, 친모는 자살했으며, 시신은 끝내 찾지 못했다. 그러니 남아 있는 우리는 아직도 `안승아 어린이'의 영혼조차 달래주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사람들은 끔찍한 비극을 잊어갔고, 그 후로도 세상은, 그리고 도시는 별로 나아지지 않은 채 아무 일도 없던 듯 일상을 살고 있다.

10년이 지난 `지금'입양된 어린이 한 명이 또 어른들의 학대로 목숨을 잃었고, 세상은 끔찍했던 지난 일들을 떠올리며 비통하게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이 비극을 `00양 사건'으로 부르지 않겠다. 절대 강자인 어른에게 희생당한 피해 어린이는 그/그녀가 가졌던 이름의 `개별성'에 경도되는 것은 `악행'에 대한 사회적 공동의 책임을 외면하려는 작태와 다름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분노와 원통함을 주체할 수 없는 선량한 사람들은 피고인 호송버스를 둘러싸고 절규했으며, 무덤에 헌화하며 애도하고 반성하며 후회하고 있다. 처벌과 단죄에 대한 목소리는 엄중하고 슬픔에서 비롯되는 연민과 동정은 무성한데, 기억은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는 약속은 이번에는 제대로 지켜질 것인가. 제발 그 절규와 분노, 그리고 반성과 각오의 공동선이 공허하다는 생각은 나만의 것이길.

또 다른 죽음들이 있다. 떨어져 죽고, 끼여서 죽고, 아예 펄펄 끓는 쇳물에 빠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죽음들이 매일 7명씩 아직도 계속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그런 나라가 있다.

해마다 2400여명이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다 죽어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이 나라는 3년 전에 이미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긴 대한민국. 그곳에서 매일매일 죽어가는 노동자는 악마 같은 어른에게 희생된 어린이만도 못하다. 적어도 죽음을 애도하거나 연민하는 사회적 공감이 그렇다는 얘기다. 그러니 어린이들의 희생에 대한 대책은 기민하고 통렬하며 과장되게 머리를 조아리기도 하나,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제각각 빠져나갈 궁리만 하면서 책임을 미룬다.

연민, 혹은 동정은 불쌍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이어지는 공감으로 맞닿아 있어야 한다. 영어 단어 Sympathy와 Empathy는 비슷하게 쓰이나 연민과 동정(Sympathy)이 공감(Empathy)되는 과정에는 감정 이입과 더불어, 나도 그렇고 나 또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아동학대로 인한 어린이의 희생에 대한 연민, 동정은 전적으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고통이거나 곤경, 혹은 생명의 위험 내지 잃음의 결과에서 만들어진 타자로서의 선량함에서 비롯되는 호의에 해당한다.

공감 역시 (아동학대로 인한 희생 등) 나로부터 벗어나 있는 비극적 현실에 대한 애틋한 연민과 동정에서 시작되나, 거기에는 다른 사람에게 닥친 위기와 절망적 상황을 인식하는 상상을 토대로 고통과 분노 등에 대한 공동의 감정이 있어야 가능하다.

일하다 죽어가는 노동자의 죽음은 단지 한 사람의 세계와 세상이 무너지고 닫히는 것만이 아니다. 그 비극에는 적어도 밥벌이가 가능할 만큼 애지중지 키워 온 부모의 하늘이 무너지거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가장의 빈자리로 가족 구성원 전체가 졸지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연대의 절망이 있다.

어른의 폭력에 희생되는 어린이의 비극은 없어져야 한다. 사람을 살리지 못하는 자본과 기업의 존재 역시 마찬가지다. `연민과 동정'의 애틋함을 `함께하는 공감'으로 키우는 모두의 힘이 그런 세상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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