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와 그루밍
상처와 그루밍
  • 김현기 여가문화연구소장·박사
  • 승인 2021.01.10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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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여는 창
김현기 여가문화연구소장·박사
김현기 여가문화연구소장·박사

 

우리 집에는 여섯 마리 마당 고양이가 산다. 가을이와 새봄이, 네 마리 새끼 고양이인 자몽, 망고, 레몽, 체리다. 유난히 추운 이번 겨울을 따뜻이 보내라고 살 집을 지어 주었다. 햇볕 잘 드는 테라스에 놓고 먹이도 준다. 녀석들은 하루 대부분을 새집과 테라스에서 지낸다. 덕분에 집 안에서도 고양이들이 잘 보인다. 처음에 경계하던 새끼 고양이들도 문만 열면 쪼르르 달려오고 가끔은 발라당 누워 배를 보여 준다. 친해졌다는 뜻이다. 신뢰한다는 의미다. 고양이들은 많은 시간 그루밍 한다. 고양이 혀에는 고리 모양의 돌기가 있는데 이것으로 몸의 이곳저곳을 핥고 단장한다. 자신의 몸만 그루밍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해준다. 몸에 상처가 나면 더 자주 오래도록 그루밍한다. 고양이들은 그루밍으로 관계를 돌보고 그루밍으로 상처를 치료한다.

우리는 자주 상처받는다. 상처 때문에 아파하는 연약한 존재다. 칼이나 총보다도 관계로 상처받는다. 대부분 상처는 관계의 틀어짐에서 나오고 원인은 `말-言'이다. 우리는 말로 상처받고, 말로 관계를 돌보고, 말로 관계를 끝낸다. 말로 인한 관계의 틀어짐은 마음에 생채기를 낸다. 괴로움의 상처는 과거의 말과 기억에서 시작한다. 누군가가 했던 서운한 말, 모진 말, 버림받았던 일들을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지난 일들을 사진처럼 기억하면서 환영에 집착하고 매달려 고통을 키운다. 과거의 어둠이라는 감옥에 자신을 가둔 것이다.

이미 지나간 기억을 품고 살면서 때때로 떠올리고 괴로워하는 것은 오래된 연속극 재방송을 보는 것과 같다. 옛날 일을 떠올리면 뇌는 그 일을 실제처럼 착각한다. 뇌는 현실과 기억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좋은 일을 떠올리면 웃음이 나오고, 상처받은 일을 떠올리면 눈물이 흐른다. 감정은 무의식적으로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에 지나간 일들을 상처로 간직한 채 사는 것은 고통이다.

과거는 생각 속에만 존재한다. 실재하지 않는 기억이다. 그런데 습관처럼 슬픈 녹화방송만 찾아본다. 상처는 기억을 붙들고 있는 내 마음에 산다. 괴로운 것은 누가 상처를 줘서가 아니다. 누가 모진 말을 해서도 아니다. 상처받을 일이 아닌데 마음에 품고 살다가 수시로 꺼내 보며 괴로워하기 때문이다. 무거운 과거를 짊어지고 가지 말아야 한다. 지금의 슬픔이 기억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안다면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원망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면 된다. 용서하면 된다. 감사하면 된다. 세상에서 나를 괴롭히는 사람, 고통에 빠트리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상처받은 기억을 놓지 않아 생긴 문제다. 모진 말을 잊지 않아서 생긴 괴로움이다. 이것을 깨달으면 상처는 치유된다. 용서는 한 번 하면 되지만 고통은 오랫동안 괴롭게 한다.

우리는 소중한 존재다. 지난 일은 과거일 뿐이다. 상처의 녹화방송을 다시 틀지 않는다면 이 순간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과거의 실패와 상처는 인생의 자산이다. 실패에서 배우고 상처를 돌보면 새 살이 돋아나고 성장한다.

과거에서 벗어나 아픈 기억에서 해방되자. 오래된 망령의 유혹을 벗어 버리자. 갈등과 대립의 시대를 끝내고 `공존과 공생'의 시대를 열자. 철 지난 과거를 더는 소환하지 말자. 지난 일로 상처 주고 상처받지 말자. 새로운 `상생'의 가치로 상처를 치유하자. 새해에는 고통이라는 기억의 족쇄를 끊어 내고 행복의 날개로 날아가자. 2021년이 상생의 사회로 나가는 오래된 상처를 치료하는 그루밍의 원년이 되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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