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니
끼니
  • 김용례 수필가
  • 승인 2021.01.07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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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용례 수필가
김용례 수필가

 

우리는 지금 어쩌다 이렇게 해괴망측한 세상에 사는 걸까.

코로나19가 참으로 무섭고 싫다. 아들은 밥벌이를 위해 바다 건너가 있다. 몇 달 만에 휴가를 왔지만 외국에서 들어왔으니 보름간 격리를 해야 한다.

아들이 옆방에 있어도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멀리 있을 때보다 보고 싶은 마음의 갈증이 극에 달한다. 그래도 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길 고양이에게 밥을 주듯 하루 세끼 밥을 일회용 그릇에 담아 아들이 있는 방문 앞에 놓아 준다. 코로나19라는 괴물이 부른 행패다.

빨리 봄이 왔으면 좋겠다. 마당에 풀이라도 뽑고 나무에 잎이 나고 꽃이 피는 것을 바라보면 덜 불행 할 것 같다. 흙에서 무언가 꼬물꼬물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는 봄이 기다려진다. 요즈음은 출입이 불편하다 보니 하루 하는 일이 세끼 찾아 먹는 일로 시간을 채우는 것 같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그동안 놓쳤던 영화를 몇 편 보았다. 그중에 한편이 킹덤이다. 내용은 굶주린 백성들이 인육을 삶아 먹고 괴물이 되는 병에 걸린다. 괴물이 되면 사람의 피를 먹으려고 사람을 잡아먹는다.

괴물에게 물린 사람은 또 괴물이 되는 소름끼치게 무서운 장면이 수없이 등장한다.

그 괴물을 이용해 권력을 잡으려는 정치세력들도 결국 괴물에게 물려 그들도 괴물이 된다. 영화를 보면서 권력과 배고픔은 참을 수 없는 유혹 인가 싶기도 하다.

어렸을 때 뭔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될 때 부모님 속 썩여 주는 일은 밥을 굶는 일이었다. 하루만 굶고 있어도 부모님은 두 손을 들었다. 내가 부모가 되고 보니 자식들이 어떤 이유로든 밥을 먹지 못하면 애가 타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오죽하면 옛말에 내 논에 물들어가는 소리와 자식 입에 밥 넘어가는 소리가 제일 좋다는 말이 있었을까. 종일 빈둥거려도 끼니는 돌아왔다. 바쁜 날도 세끼, 놀면서도 세 끼니는 먹어야 사는 것이다. 아들은 저 때문에 엄마가 고생한다고 걱정이다. 나는 젊은 것이 그 멀리에서 집이라고 왔는데 제 처도 못보고 방안에 갇혀 지내는 것이 속이 아픈데 말이다. 지에미가 밀어 넣어주는 세끼 밥을 군말 없이 떠끔떠끔 먹어주는 아들이 안쓰럽고 고맙다. 보름간의 격리를 불평 한 마디 없이 잘 마쳤다.

끼니라는 말에는 가난함과 가여움과 쓸쓸함과 외로움이 묻어 있다. 우리 아들은 보름 동안 쓸쓸하고 외로운 밥을 먹었다. 끼니라는 말은 밥과는 다른 느낌이다. 세끼 밥을 찾아 먹고사는 일은 평범한 일상 같지만 우리는 그 끼니를 먹기 위해, 그리고 누군가의 끼니를 채워 주기 위해 일을 한다. 어떤 날은 자존심을 주머니에 처박고 비굴하게, 어떤 날은 허세를 부리며 끼니를 벌어온다.

우리는 하루 세끼를 거하게 먹거나 소박하게 먹거나 내 몸에 에너지를 만들어야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가끔은 먹는 것이 치사하게 느껴져도 먹어야 한다. 끼니는 가엽게 때우고, 밥은 평범하게 먹고, 진지는 어른이 잡수신다. 끼니는 우리의 생을 이어가는 점선이다. 그 점선을 찍지 못하는 날이 생의 마지막이 되는 것이다. 나는 코로나19의 위협에도 오늘 내게 어김없이 돌아온 생의 한 점을 찍기 위해 쌀을 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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