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정하동 느티나무
청주 정하동 느티나무
  • 정인영 사진가
  • 승인 2021.01.05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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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정인영 사진가
정인영 사진가

 

어쩌면 그때 이미 청주 정하동 느티나무는 자신의 몸이 차츰 쇠락해 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던가 보다. 해 질 녘 하루의 마지막 찬란하게 불타는 햇빛을 받으며 그 단아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며, 때묻지 않은 노년의 모습으로 황량한 들판을 둘러보고 있던 느티나무는 차라리 옛 선비로서의 순수한 내면을 보여주는 것 그대로였다.

오랜 세월동안 논 한가운데서 언제 어느 때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느티나무는 불과 십여 년 전의 그 아름다웠던 자태가 아니다. 이제 간신히 옛 모습을 다시 한 번 보이려는 듯 안간힘을 쓰는 듯한 느티나무에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한다.

그 넓은 들판에서 그 누구와도 언제나 한 번도 얼굴 찡그리는 일 없고,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하는 이야기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그저 묵묵히 세월의 흐름만을 지켜온 느티나무의 단아한 모습에 어찌 안쓰러운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정하동 느티나무는 꽃 피고 새들 노래하는 봄이 오면 항상 착하기만 한 농부가 한해 논농사를 못자리부터 시작하는 것을 바라보며 농사철이 되었음을 알았고, 찌는 듯한 땡볕 아래서도 부지런한 손놀림으로 일하는 농부들에게 풍년을 기약해 주었으며, 온 세상이 호화찬란한 황금빛 벌판으로 변하였을 때 농부들에게 가슴 가득한 기쁨을 안겨 주었다.

그 느티나무가 한겨울 살을 에는 듯한 북풍한설을 맞으며 빈 들판 가운데서 있을 때는 아무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고, 찾아보지 않아도 오직 근처 철길 위를 급하게 오고 가는 열차만을 바라보며 추운 몸을 스스로 위로하고 추슬렀을 것이다.

하루해가 지고 이슥한 밤이 되면 멀리 조는 민가의 불빛을 보면서 자신의 신세를 보듬었을 느티나무는 마을 앞을 가끔씩 오고 가는 자동차 불빛에서 인간들의 삶을 조용히 헤아리고 있었을 것 같았다.

나무는 꿈을 먹고산다고 했다는데 정하동 느티나무도 그런 꿈을 키워갔는지 궁금하다. 늠름한 기상의 아름다움으로 굳은 지조와 절개를 지녀왔을 그 느티나무는 이제 옛 모습이 아니다. 쇠약해지고 오그라들어 볼품없는 모습으로 근근이 세월을 살아가고 있다.

정하동 느티나무는 사람들의 양식을 대어주는 논 한가운데서 해마다 잎을 피우고, 잎이 물들어 떨어지면 차디찬 겨울 추위를 홀로 감내하면서 다가올 새봄을 사람들과 잔잔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맞이하였다. 이렇게 사람들의 가슴 한복판에 굳게 자리한 느티나무가 세월의 흐름 속에서 서서히 그 큰 몸을 줄여가고 있음은 이 느티나무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슴 저린 아쉬움을 안겨주고 있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지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정하동 느티나무는 이 마을의 수호신이자 이곳 들판의 수호신이다. 그래서 이 느티나무의 잎이 왕성하게 자랄 때 마을도 번창하고, 풍년이 들었다고 한다. 세상에 질긴 생명이 느티나무만 못하리라는 말과 같이 느티나무가 다시 기운을 차려 몇 아름의 큰 나무로 건강해졌으면 좋겠다.

스물다섯 해의 날들이 흘러간 오늘 그 시절의 정하동 느티나무가 그립다. 그렇게 쇠약해져 가는 느티나무가 어느 날 사라지고, 그 자리에 하이얀 비닐하우스가 들어서 있어 언제 이곳에 느티나무가 있었는지 아득하게 지난 이야기가 되었다. 없는 것도 있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녁 노을에 그 아름다운 자태를 한껏 자랑했던 정하동 느티나무는 그 이후 아스라한 기억과 함께, 그저 한때 찍어놓은 사진만이 내 손에서 늘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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