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유토피아
  • 정명숙 수필가
  • 승인 2020.12.28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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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수필가
정명숙 수필가

 

타임머신을 탄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최면을 건 것도 아니다. 현재의 삶을 그대로 두고 아득한 시절로 되돌아가는 길은 마음만 먹으면 의외로 쉬운 일이었다.

여행가자는 말이 나왔을 때는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 했다. 각자의 배우자를 두고 우리만 떠난다면 대화를 하거나 행동에 제약받을 일 없으니 훨씬 자유로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설렘이 가득하기도 했다.

관광지보다는 숲을 찾아 많이 걷고, 맛있는 음식점을 가거나 카페에 앉아 수다를 떨자는 것에 목적을 뒀다.

오남매 중 셋째만 사정상 참여하지 못하고 2박 3일의 일정으로 제주도로 떠나는 날, 서울에 거주하는 여동생은 김포공항에서 비슷한 시간에 출발하고 남동생 둘과 나는 청주에서 출발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서 우리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과거의 유년을 향해 달렸다.

완벽하게 남아 있지 않아도 좋았다. 태어나 자라면서 함께 뒹굴고 때로는 싸움질도 마다 않던 피붙이들이다. 타인의 눈길도 아랑곳하지 않고 생의 유토피아였던 유년의 뜰에 모여 왁자하다. 앞만 보고 지나온 세월도 잊고 동심으로 돌아가 아무것도 아닌 일에 해맑게 웃는다.

주고받는 말 속에 가시가 없으니 목소리가 맑고 청아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너그러워지는 게 얼마만인가.

과거의 아름다웠던 기억을 떠올리는 향수는 마음은 물론이고 몸도 따뜻하게 한다. 성년이 되어 서로 다른 길을 가면서 누군가 어려움을 겪어도 배우자의 눈치를 보며 선뜩 대신 해 줄 수 없어 마음만 아프던 날들이 목을 타고 울컥 올라온다.

나는 고달픈 네 삶이 안쓰럽고 너희는 누이의 삶이 눈물겨웠으리라. 제주도에 도착한 첫날은 야외 카페에 앉아 햇살에 반짝이는 쪽빛 바다를 보며 그렇게 한나절을 수다로 보냈다.

오롯이 우리만 있는 것이 그냥 좋았다. 그러고도 늦은 밤까지 어릴 적 얘기와 어렵게 공부하던 시절에 머물러 서로를 다독이고 현재의 삶을 위로했다.

다음 날은 사려니 숲을 걷고 붉은오름으로, 그리고 산굼부리를 갔다.

제주도는 자주 오는 여행지다. 막내는 사려니 숲이 좋다고 했다. 나는 붉은오름을 오르고 싶다 하고 둘째는 억새를 보러 산굼부리도 가자고 했다.

서늘한 바람에 갈꽃이 하들하들 깃털처럼 나부끼는 사려니 숲길에서는 느린 걸음으로 서로에게 극진했다. 붉은오름은 힘들다고 투덜대면서도 웃느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산굼부리의 억새를 보면서는 천진난만한 개구쟁이처럼 뛰어놀았다.

여동생은 함께 하는 2박 3일의 여정을 사진에 담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다.

첫날부터 무조건 웃어야 찍어준다는 강제적 포즈에 이젠 자연스럽게 길들여지는데 남은 하루가 몹시 아쉽기만 했다.

돌아오는 날, 동생들은 서로에게 제주도의 특산물을 잔뜩 사서 안겨주면서도 더 사주지 못해 안달이다.

제 가정으로 돌아가 그 집 식구로 살아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인데 안쓰러워서일까. 김포공항으로 여동생을 떠나보내고 우리도 청주로 돌아왔다.

도착시각에 맞춰 큰 올케가 큰 동생을 태워가고 뒤따라 막내 올케가 막냇동생을 태우고 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주차장으로 향했다. 사흘간 머물렀던 유년의 유토피아가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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