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재 이상설 기념관
보재 이상설 기념관
  • 공진희 기자
  • 승인 2020.12.2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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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공진희 부장 (진천주재)
공진희 부장 (진천주재)

 

1870년 진천에서 출생한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은 1894년 조선 왕조 마지막 과거인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교수·관장, 궁내부특진관,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에 임명되었으며 이 무렵 헐버트와 친교를 맺고 영어·프랑스어 등 외국어와 수학·물리·경제학 등 신학문을 공부했다.

1906년 간도 용정촌에 근대적 항일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신학문과 항일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1907년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자 고종은 이상설을 정사로, 이준(李儁)과 이위종(李瑋鍾)을 부사로 삼아 특사로 파견했다.

`헤이그 특사 파견은 한국의 민족운동과 독립운동 사상에서 해외에 한국민의 독립의지와 일제의 불법침략행위를 처음으로 알리어 독립전쟁의 서막을 열었다고 평가'(헤이그 특사의 역사적 의미와 이상설의 역할/이명화) 받고 있다.

헤이그 특사 파견과 이에 따른 광무황제의 강제퇴위, 군대해산은 국내에서 비밀결사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신민회로 하여금 독립전쟁으로 방향을 전환케 해주었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친일 외교고문인 스티븐슨을 처단하는 전명훈·장인환 의거를 일으키게 한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안중근 의사는 이상설을 `세계 대세를 통해 동양의 시국을 간파하고 있으며 기량이 크고 사리에 통하는 대인물로서 대신의 그릇이 됨을 잃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보재는 1914년 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정재관 등과 함께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정통령에 선임되었다.

이후 이상설은 1917년 4월 망명지인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유해는 화장되고 문고도 모두 불태워졌다.

보재 이상설 선생 기념관 건립 사업이 드디어 첫 삽을 떴다.

기념관 건립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진천문화원은 17일 진천읍 산척리 이상설 생가 일원에서 기념관 건립을 위한 착공식을 개최했다.

기념관 조성 사업은 그동안 사업비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민간단체인 기념사업회가 2016년 총사업비 87억7000만원을 들여 산척리 이상설 생가 인근에 9349㎡ 규모의 기념관 건립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기념사업회가 마련하기로 한 자부담을 확보하지 못해 사업은 답보 상태에 빠졌다. 결국 사업 주체를 진천문화원으로 변경하고 사업비도 60억원으로 줄였다.

자부담 문제는 진천군이 공동 출자한 송두산업단지개발㈜과 향토기업인 금성개발㈜ 등의 지원, 주민들의 자발적인 모금으로 마련한 성금으로 사업 추진 기반을 갖췄다.

또한 기념관 건립을 위해 지역의 각계 전문가 28명으로 구성된 진천문화원 보재이상설선생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가 짜임새 있는 사업 추진을 위해 발벗고 나서면서 사업이 더욱 탄력을 받게 됐다.

보재 기념관은 선생 관련 자료를 지속적으로 발굴 수집함은 물론 자원봉사자, 프로젝트 등과 같은 다양한 방식을 통해 지역주민들이 기념관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료를 전시하고 기념하는 역할을 뛰어넘어 그의 정신이 현재의 우리에게 던지는 시사점을 곱씹어보며 미래를 설계하는 상징적 공간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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