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
막걸리
  • 정인영 사진가
  • 승인 2020.12.21 19: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고
정인영 사진가
정인영 사진가

 

내가 좋아하는 술은 막걸리다. 술은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마시지만 아무래도 술, 하면 막걸리가 제일이다. 소주나 맥주는 별맛을 모르면서 먹지만 막걸리는 그 맛을 제대로 알기에 온몸으로 느낀다.

막걸리는 언제든지 첫 잔은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단숨에 모두 마신다. 그것도 막걸리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가 마치 마른 논에 봇물 들어가듯 꿀꺽꿀꺽 잘도 넘어가며 잔에 찌꺼기 하나 남지 않도록 깨끗하게 비운다.

모든 술에는 꼭 안주가 있어야 한다지만 나에게는 막걸리에 안주가 굳이 필요하지는 않다. 김치면 된다. 무슨 산해진미는 아니더라도 김치가 제격이다. 막걸리 한잔을 목에 넘기고 나서 김치 한쪽 입에 넣고 씹을 때, 술과 어우러진 안주의 그 맛 또한 세상 어느 것에 비길 바가 못 된다. 입안에 가득 펼쳐진 막걸리의 깊은맛 내음에 질세라 아삭거리는 김치 먹는 소리는 하나의 잘 다듬어진 화음과 다름없다.

막걸리 사랑은 50여 년 전 열한 살 어린 시절의 아버지의 막걸리 애정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한다. 학교에서 집에 오면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얘. 안반내 양조장에 가서 막걸리 사 와”하신다. 양조장에서 사 와야지, 술집에서 사면 안된다는 말씀을 뒤로 한 채 주전자를 들고 집을 나선다.

그런데 이웃 동네 양조장에까지 가는 것이 그때는 어찌나 창피하고 부끄러운지 술 심부름을 시키는 아버지가 싫었다. 나는 양조장 가기 중간쯤에 있는 술집에 들어가 막걸리를 사 가지고 돌아온다. 양조장에서는 주전자에 하나 가득 담아주는 막걸리가, 술집에서는 조금 못 미치게 준다. 이것을 집 근처 샘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채운 후 아버지에게 갖다 드리면 “한잔 먹어보면 더 안다” 하시면서 막걸리를 한잔 따라 입에 넣으시고 난 즉시 양조장 막걸리가 아니라고 나무라시고는 다시 사오라고 시키셨다.

당연히 주전자를 들고 양조장을 향해 가는 것은 아무리 어린 소견이라도 두 번씩 아버지를 속일 수는 없는 것은 물론 도대체 색깔이 똑같게 생긴 막걸리를 어떻게 아실까라는 궁금증이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다시 사 온 막걸리를 잡수시고 난 아버지는 그제야 만면에 흡족한 표정이 되셨다. 이후로는 한동안 아버지가 시키시는 막걸리 사오는 것에 꾀를 부리지 못하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그때는 아버지가 대단한 신통력을 지니셨던지, 아니면 어떤 비법이 있었는가고 여겼던 시절이 머릿속 저편에 아득하게 느껴질 듯 하면서도 한편 잊혀지지 않는다.

당시의 의문을 서서히 알게 된 나의 막걸리는 이제 입에 맞고 안 맞음, 술맛의 높고 떨어짐에 하나도 틀림이 없음에 이르렀다. 요즈음 막걸리를 마시는 것에 나 나름대로 특이한 바람이 있으니 그것은 길 가다 누구든 아는 사람을 만나면 가게든 술집에서든 아무 곳에서나 왕잔으로 기운차게 마셔보는 거다. 헌데 지난 10여년 동안 그런 기분을 느꼈던 적이 두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지금도 길을 걸어갈 때에는 항상 누군가를 기다리고 살피는 것이 또 하나의 버릇이 되었다. 주변에 무수히 많은 막걸리가 있다지만 입에 넣고 인생의 참 술 맛을 한껏 음미하는 나에게 무슨 막걸리라도 가릴 것이 없을 것 같다. 그저 탁배기 한잔에 즐거움은 넘쳐나고 남을 것이기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