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눈이 내리면
바다에 눈이 내리면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0.12.15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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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얼마 만이란 말인가. 바다가 노을을 집어삼키는 저 황홀한 순간을 보는 시간이. 시간이 많다고 하여 떠날 수도 없는 날들이었다. 거의 일 년 만이었다. 남편의 일은 여름이 제일 바쁜 철이라 피서도 즐길 여유가 없다. 때문에 남편과 둘이 함께하는 여행은 될 수 있으면 겨울로 잡는 편이다. 더욱이 12월은 우리의 결혼기념일이 들어 있는 달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12월은 이렇게 어디론가 매해 떠나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코로나는 수그러들 기미도 없이 오히려 점점 그 기세가 커져만 가고 있다.

부적을 챙기듯 나는 마스크를 손가방과 짐 가방에 많이도 쟁여 넣었다. 일박이일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싶었다. 우리는 가는 차안에서도 식당은 사람이 없는 곳을 피해 들어가며 바닷가를 거닐 때도 한적한 곳으로 다니자며 서로에게 행동지침으로 다짐했다. 제부도의 바닷길이 열리는 시간에 맞추느라 부지런히 달려오니 이미 섬에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는 차들로 정체가 심했다. 바닷길이 열린 후에도 워낙에 많은 차들이 들어가서인지 속도를 내지 못했다. 덕분에 마침 바다에서 한참 지는 노을을 마주하게 되었다. 아직 다 밀려나지 못한 먼 데 바닷물이 태양을 끌어당기고 있는 듯 붉은 잔영이 넓은 갯벌을 물들여 놓고 있다.

그 많은 차들 속에 탔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짐도 풀지 않은 채 펜션마당에 차를 주차해 놓고 남편과 나는 서둘러 노을을 볼 요량으로 바닷가로 나왔다. 그런데 바닷가를 거니는 사람도 없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바다를 향해 줄지어 서 있는 횟집들은 밝은 조명등을 번쩍이며 손님들을 유혹하지만 식당마다 손님이 있는 집은 드물었다. 맘씨 좋아 보이는 아저씨의 손짓에 우리는 `전라도 ㅇㅇ'라는 조개구이집으로 들어갔다. 텅 비어 있는 가게는 꽤 넓은 공간이었다. 주말인 이때쯤이면 얼마나 많은 사람으로 붐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로 모든 가게가 9시까지밖에 영업을 하지 않는 상황은 이곳이 관광지임에도 예외는 없었다. 우리도 서둘러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와 짐을 풀었다. 그런데 사람은 없는데도 섬 전체에 음악이 크게 흘러나왔다. 놀이 공원을 연상하게 만드는 음악이었다. 따뜻한 커피를 타서 우리도 숙소 방 앞에 있는 야외용 탁자에 앉았다. 그 분위기를 즐기고 싶었다. 이따금씩 들리는 폭죽과 함께 어두운 하늘에 퍼지는 불꽃이 이곳이 바닷가임을 알려주는 듯했다. 펜션 마당에는 장식등이 여기저기 매달려 있어 쌀쌀한 겨울밤을 따뜻하게 해 주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따뜻한 커피 한잔과, 하늘에서 불꽃들이 만들어내는 빛들과 너무 크지도 않은 음악을 들으며 서로에게 위안과 축하의 눈빛을 전했다. 짧지 않은 32년을 함께 걸어와 줘서 고생했고 고맙다고, 그리고 축하한다고. 앞으로 얼마나 많은 날을 함께 할지는 모르지만 또 열심히 최선을 다해 걸어가자고.

이른 아침, 남편의 핸드폰 알람소리에 잠이 깼다. 커텐을 열어 본 순간, 하얀 눈이 야외용 탁자 위에, 나뭇가지 위에 그리고 저 먼 산 위에 하얗게 쌓였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함박눈이 지금도 계속 펑펑 내린다. 신혼여행을 갔던 그때도 꼭 이랬다. 설레고 두려웠던 그때, 하얀 눈은 어린 신부의 마음을 포근히 감싸 주었다. 아마도 첫날밤 눈이 많이 내리면 잘 살 것이라는 세간의 속설을 떠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 바다에 눈이 내리고 있다. 첫눈이다. 바다에서 맞는 눈은 처음이기에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바닷가에 만들어 놓은 데크 길을 남편과 나는 팔짱을 끼고 걸었다. 나는 첫날밤 함박눈을 생각했다. 그리고 바다에 내린 눈도 생각했다. 부디 첫날밤 함박눈처럼, 오늘 바다에서 내린 첫눈이 모든 이들의 일상을 되돌려 줄 수 있는 신호의 눈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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