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엘 피터 위트킨, 죽음의 공포를 찍는 사진작가
조엘 피터 위트킨, 죽음의 공포를 찍는 사진작가
  • 이상애 미술학 박사
  • 승인 2020.12.09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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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산책

 

미술가의 삶이 자신의 작품 형성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마도 필연일 것이다. 작가가 살아가는 환경은 말할 것도 없고, 작가가 태어나서 자라기까지의 개인의 역사 또한 작품 형성의 기저를 이루게 된다. 자신의 경험이 어떠한 것이든, 그 개인의 경험이 창작의 소스가 되고 그것이 유형의 것으로 재탄생되어 예술 작품이 된다.

인간의 가장 강력한 감정은 공포, 특히 죽음에의 공포일 것이다. 1939년 브루클린출생인 위트킨은 죽음의 공포를 찍는 사진작가이다. `죽음의 공포'가 그의 작품의 저변을 이루는 것은 그의 유년시절 경험에서 유래한다.

그는 6세 때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가던 중 한 자동차 사고를 목격했는데, 그때 절단된 소녀의 머리가 그의 발 앞까지 굴러온 것을 본 경험이 있다.

또한 베트남 전쟁 때 종군 사진기자로 참여하여 사고로 죽거나 극도의 공포 때문에 자살한 병사의 죽음을 기록한 경험을 갖고 있다. 이러한 배경들은 그의 작품의 주제가 `죽음의 공포'로 이어질만하기에 충분했다.

위트킨의 사진 전반에는 도착적 에로티시즘이 근원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도착된 에로티시즘은 그 자체가 가지는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성격 때문에 죽음의 본능을 유발시키지만, 사진이 가지는 죽음에 대한 초월적 성격으로 인해 죽음의 본능은 다시 정제된다. 독특하고 예리한 감성을 배경으로 폭력적이고 섬뜩한 시각을 구축하면서 사진의 본질, 더 나아가 시각예술의 본질에 대한 깊이 있는 물음을 통하여 자신의 예술세계를 거리낌 없이 펼치고 있다.

위트킨은 사회의 실질적 이미지에 그 특유의 광기 어린 표현으로, 보는 사람들의 감수성과 정서를 마비시켜 견디기 어렵게 한다. 그의 작품은 우리의 정서를 순화시켜주는 감상적인 면은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각막의 표면에 이단의 공간이 자리할 것 같은 두려움과 낯섦에 좌절하고 만다.

이처럼 보는 이의 감정과 정서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그의 독단은 감상자로 하여금 나 이외의 또 다른 `나'란 존재가 작품에 개입하게 한다.

우리는 절단된 신체의 부분들을 볼 때 그것이 인체에 붙어 있을 때의 상태를 지각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 사체를 살리면서 보게 된다.

작품을 바라보는 `나', 그리고 그곳에서 그 신체의 파편들을 몸에 맞추고 있는 또 다른 `나'를 바라보며 내 육체에 대한 인식을 끊임없이 자각한다.

이상애 미술학 박사
이상애 미술학 박사

 

위트킨에게 있어 그로테스크한 죽음의 상징도 신들의 재현이다. 그는 삶과 죽음에 대하여 그 재현물들을 다시 우의로 가득 찬 동화와 같은 문장으로 우회적이면서도 고혹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 내재된 종교적 숭고함과 통제되고 억압된 욕망은 잠재된 무의식을 흔들어 감성의 핵인 `미(美)'마저도 아이러니로 만들어버리고 부유하는 환상게임을 전개한다.

어린시절 죽음에 대한 공포의 감정이 성인이 된 위트킨에게 남아 내면에 어린 위트킨을 안고 살아야 했던 그는 죽음의 측면에서 본 삶의 기억을 창조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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