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사랑
책 사랑
  • 김정옥 수필가
  • 승인 2020.12.09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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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정옥 수필가
김정옥 수필가

 

사랑은 소유인가. 책이 좋아 자꾸 사들인다. 작가의 철학이 궁금하고 글쓰기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이런저런 구실을 달고 구매하기를 클릭한다. 사놓고도 아직 읽지 못한 책, 정기 구독한 문예지, 신간 수필집 등 십여 권이 책상 한편에 수북이 쌓여 있다. 그런데도 필feel이 꽂히면 영락없이 누른다. 아무래도 품고 싶은 마음이 사랑의 시작인가 보다.

좋아하니 곁에 두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일 터이다. 읽다가 둔 책이 여기저기 굴러다닌다. 침대 머리맡에도 뒹굴고 발치에서도 걸린다. 수필집 읽다 덮고, 문예지 읽다가 말고, 시집을 펴든다. 한 권을 진득하니 끝까지 읽지 못하고 이것저것 집적댄다. 후궁을 여럿 두고 서로 시샘할까 봐 이 궁 저 궁 찾는 임금 심정이 이럴까. 그 중에도 자주 찾는 궁이 있겠지. 내가 그렇듯.

여성 편력이 있는 남자처럼 이 책 저 책 가리지도 않고 다 좋아한다. 수필집은 물론 인문학 책도, 시집도 좋다. 철학책도 평론집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말 활용 사전과 속담 사전도 바로 내 옆자리다. 옛말에 `열 계집 마다하는 사내 없다'더니 내가 딱 그 꼴이다.

예전에 내 사랑법은 깨끗하게 지켜주는 것이었다. 혼탁한 세상 속에서 때 묻지 말고 살라는 내 마음의 표현이었다. 낙서는 감히 할 생각도 안 했고, 더러움이 타지 않도록 조심하였다. 읽던 쪽을 접지도 않았다. 다만 그것이 그를 위하는 것인 줄만 알았다. 그랬더니 콩나물시루에 물을 부면 주르륵주르륵 빠져나가 듯이 모두 자취도 없이 빠져나갔다.

전략을 바꿨다. 고이고이 지키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젠 책을 읽을라치면 메모장과 연필을 준비하는 것은 물론 형광펜까지 동원한다. 공감하는 부분에는 밑줄을 긋고 낯선 표현에는 네모를 둘러치고 사전을 찾는다. 반복해서 읽으며 시험공부하듯 꼼꼼하게 파고들었다. 그제야 서로 교감이 되었다. 아니, 사랑이 먼저 내 품속으로 깊이 스며들었다.

코로나19 여파로 집에 `콕' 박혀 있다 보니 책 사랑밖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애첩처럼 끼고 살았더니 부작용이 심하다.

눈은 그런대로 괜찮은데 다른 곳이 까탈을 부린다. 허리가 뻣뻣하더니 엉덩이도 아프고 다리까지 저릿하다. 어떤 날은 발등이 소복하게 부어 애를 먹었다. 그래도 손에서 놓지를 않으니 못 말리는 사랑이다. 이러다 골병드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내 사랑을 온종일 끼고 사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 밥 안 먹어도 배가 부르고, 작가의 사유와 통찰에 가슴이 벅차다. 실수담 안에 내가 있었고 재치 있는 해학에 키득키득 웃었다. 들꽃의 사랑을 보며 자연의 섭리를 깨우치고 이웃의 삶을 보며 나를 성찰한다. 내 사랑이 나를 사람답게 만든다.

갑자기 옆에 있는 낡은 시리즈물 전집이 눈에 들어온다. 칠십 년도 더 되어 케케묵어 고리타분한 책과 최신판이 섞여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덕지덕지 더께가 앉은 경륜이 있고 진중珍重한 삶의 철학도 품었다. 시행착오를 거친 노하우도 쌓여 인생의 지혜가 술술 풀려나온다. 젊은이는 모르는 역사적인 기억의 보물 창고이다. 풀피리 꺾어 불다 동갑내기 사촌 형제끼리 개울에서 빨가벗고 멱 감던 이야기는 아름다운 시집 한 권이다. 사실은 끼고 산 지 사십 년도 훨씬 넘은 오래된 사랑인데 이제야 알아보다니 나도 참 눈뜬장님이다.

속담에 `이 방 저 방 좋아도 내 서방이 제일이다.'라더니. 이 책 저 책 다 사랑해 봐도 요 전집이 최고이다.



# 김정옥 수필가=2018년 월간 ‘한국수필’등단. 제2회 한국수필독서문학상 수상.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수필작가회, 내륙문학회,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무심수필문학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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