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의 중심
바닥의 중심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1팀장
  • 승인 2020.12.08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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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알 고주알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1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1팀장

 

많은 사람이 드나들었을, 많은 것이 채워진 공간. 밤이 늦어서야 드나들던 사람들의 발길은 끊어지고, 빈 공간에 조심스럽게 발을 딛는다. 무심히 흙 한 덩이를 집어들어 싸고 있던 비닐을 벗겨 낸다. 가는 철사를 양손으로 잡고 반쯤 잘라 낸다. 손바닥으로 흙에 머금고 있던 수분이 기분 좋게 밀착된다. 보드랍다. 흙덩어리가 아니라 흙의 입자에 엉기어 있던 물기가 내밀하게 반긴다.

거듭되는 흙과의 밀당에서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느낌이다. 이젠 나에게 기회를 주는 것인가? 이제야 받아들이겠다는 미약한 신호인가? 그러나 역시 흙은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손바닥뿐만 아니라 팔뚝에, 허벅지에도 흙물이 튀었다. 뭐가 만들어지긴 했는데 그게 엉뚱하게 내 몸에 만들어진 흙의 파편들이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흙과의 만남은 오랜 시간 거듭되었다. 그리고 받아주었다.

전기물레에 흙을 올리고 양손으로 흙을 모두어 감싼다. 힘은 어깨에 주며 돌아가는 물레의 속도에 힘을 조절해 안으로 모은다. 잠시 속도를 늦추며 손을 떼고 물을 묻히고 다시 흙덩이를 감싼다. 좀 더 힘을 주고 안으로 모은다. 흙이 위로 올라간다. 다시 흙덩이의 가운데를 엄지손가락으로 가름하여 내린다. 그리고 다시 올리고 내리고를 반복한다. 흙덩이는 온전히 물레 판 위에서 논다.

도자기를 배워보겠다, 그릇을 만들어보겠다, 시작한 물레와의 싸움에서 이제 한 가닥 감을 잡았다. 결국은 중심 잡기였다. 흙의 덩어리에 시선을 응시하고 어느 쪽으로도 흔들리지 않을 중심을 잡아주는 과정이 긴 시간의 반복된 훈련이었다. 회전하는 속도에 손가락이 아닌 몸으로 중심을 잡는다.

어깨와 팔뚝, 손바닥으로 전달되는 힘의 조절은, 온몸이 정신과 하나가 될 때 흙은 허락한다. 중심이 잡힌 후에는 손가락 끝으로 살짝만 대어도 오므라들고 넓어지며 자유자재로 변형된다. 중심을 잡지 못하면 그릇을 빚지 못한다.

물레 판 위에서 중심을 잡고 빚어진 흙은, 오랜 시간 자신의 원형을 유지해 왔던 물기를 버리는 시간을 갖는다. 오랜 침묵의 시간을 갖고 드디어 불을 맞이할 시간을 갖는다. 오랜 동거의 시간을 뒤로하고 이별을, 새로운 만남을 준비한다. 둔탁한 소리가 아닌 청아한 소리를 갖는 것으로 불과의 만남을 기쁨으로 표현한다.

양손으로 받아 든 그릇에는 그토록 힘들게 찾던 중심이, 가장 낮은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중심이 잡혀야 돌아가고, 빚어지며 자연스럽게 가장 낮은 곳으로 향했다.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바닥이다. 중심은 내려앉으며 다른 부분은 올리고 다양한 형태의 모양을 잡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결국 텅 빈 공간을 만들어 냈다. 넓게 펼쳐 하늘을 받는, 맑은 하늘을 오마주하는 그래서 안과 밖의 경계를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공간, 주둥이를 오므려 내밀한 공간의 비밀을 간직한, 오랜 시간 담아낼 이야기를 조심스레 풀어내겠다는 내심이 만들어낸 공간이다. 한 덩이의 중심은 공간을 만들며 자리를 내어주었다. 자리를 내어 만들어진 공간은 비어 있다. 다양한 형태의 공간이다. 그 공간에 담아내고 또 비어 낼 것이다. 그릇의 쓰임은 비워진 공간이다.

자신의 이야기는 없다. 낮은데 있기를 자처하고 온화한 미소로 경청하여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두고 함께 고민하는 깊이가 있다.

모두가 자신의 그릇을 갖고자 고집을 피울 때 중심을 잃지 않게 잡아주는 정도, 그리고 다시 내리고 오르기를 반복할 기회를 준다.

잘 돌아가는 데는 중심축이 제대로 잡혀 있어야 한다. 그 중심의 축은 확연히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지만, 가슴에 인식되어진 존재였다.

짧은 만남이었습니다. 많은 분과 같이했지만 이렇게 짧게 느껴지기는 처음입니다. 못내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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