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의 아우라(aura)와 마티에르(mat iere)
코로나 시대의 아우라(aura)와 마티에르(mat iere)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0.12.08 17: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내가 루브르박물관에서 <모나리자>를 본 것은 꽤 오래 전 어느 해 가을날 점심 무렵이었다. 일 때문에 파리엘 가게 되었고, 기왕 온 김에 루브르는 꼭 들려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게다가 루브르에서 <모나리자>를 보는 절대적 당위성 또는 사명감에 휩싸여 있을 때였다.

16세기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는 `신비로운 미소'만큼이나 영험한 작품으로 각인되어 있었고, `현장'에서 직접 대면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그러니 루브르 박물관의 입구를 통과하자마자 뜀박질까지 하면서 맨 먼저 <모나리자>가 있는 전시실을 찾은 것은 순례자의 심정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현장'에서 만난 <모나리자>는 불행하게도 나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모나리자>를 향해 일제히 양손으로 휴대폰을 높이 들어 리고 있는 군중의 뒷모습은 맹목의 경배와 찬양을 방불케 했고, 나는 좁은 사람들 틈 사이로 유리벽에 갇힌 가로 53cm 세로 77cm의 그림 한 점을 곁눈질하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그 억울한 만족을 억누르고 돌아서는 내 발걸음 뒤로 경건한 박물관을 뛰어 다니느라 쿵쾅거리는 심장의 박동이 갑자기 부끄러웠다.

우리가 굳이 `현장'을 찾아 위대하다고 평가를 받고 있는 미술작품을 보려는 까닭은 원작에서 뿜어내는 아우라(aura)를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감흥이 어떻게 우리의 심장과 오감을 휩싸며 작동하게 되는지를 확인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아우라(aura)는「`주위를 감도는, 또는 사람·물건 등에서 발산되는 듯한'독특한 냄새」또는 「예술작품에서, 흉내 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이거나 「어떤 대상을 가진, 다른 것과 구별되는 독특한 분위기」를 뜻한다. 원작이므로 가질 수 없는 차별성과 유일성, 그리고 신화적으로 포장된 명작에 대한 맹목적 경외심이 아우라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셈인데, 따지고 보면 `환상'의 일종일 수도 있겠다. `현장'을 확인해야만 만나는 `환상'에 감동하는 인간의 감각. `참'인가, `거짓'인가.

박물관이거나 미술관, 전시실 등의 직접 공간에서 원작으로 (미술)작품을 만나야 하는 이유 중 또 다른 하나는 바로 `마티에르(mat iere)'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질감'쯤으로 번역되는 `마티에르'는 그림의 표면에 나타나는 물감, 붓 또는 연필 등 화가가 사용한 도구의 촉, 화구 등에 의한 (아련한) 흔적을 말한다.

마티에르는 `현장'에서 작품과 관람자의 일대일 대면을 통해 섬세한 붓 터치 등 작가의 열정을 세심하게 살펴보는 일로 느낄 수 있다. 작가의 의도와 큐레이터에 의해 조화를 이루는 전시 배치, 그리고 조명과 어우러지면서 나타나는 미묘한 색감의 변화는 마티에르를 통해 만끽할 수 있으며, 그때 우리는 원작이 뿜어내는 아우라를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아우라와 마티에르를 느낄 수 없는 암울한 시대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다. 모든 `현장'에서의 전시와 공연은 신중해야 하며, 고육지책으로 벌어지고 있는 거의 모든 예술 활동도 온라인으로 대체되는 시대에 갇혀 있다. 그리고 그 혼란의 와중을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원작을 `참'으로 여길 때, `가상'일 수밖에 없는 온라인의 세계를 통해 예술작품의 아우라와 마티에르를 느끼기는 어렵다. 평면 작품의 경우 그 크기조차 가늠하기 힘들고, 입체적이거나 동작이 있는 작품과 공연에서 운동성과 현장의 독특한 분위기를 전달하는데 한계가 있다.

재미는 없다. 극장에서 보는 영화와 방구석 1열일지라도 모니터로 보는 영화는 느낌이 다르다. 온라인 서비스라는 작가들의 안간힘에도 불구하고 가상의 세계에서 만나는 예술작품에 몰입하는 능력은 아직 모자라고 꼼꼼하게 살펴보는 인내심도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이 깊어질수록 위세를 더하고 있는 코로나19의 엄중하고 냉혹한 현실은 `현장'에서의 만남을 더 미뤄야 하는 참을성을 요구하고 있다.

다만 코로나 이전의 우리가 그동안 `참'으로 여겨왔던 것들의 진정한 아우라가 맹목적인 추종이거나 환상이었던 것은 아닌지 성찰하는 스스로의 마티에르를 만드는 시간이 깊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멀리 있어도 깊어지는 우리'가 코로나를 이길 수 있다. 코로나를 이기는 우리들의 아우라(Aura)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