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향수
  • 임현택 괴산문인협회지부장
  • 승인 2020.12.02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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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임현택 괴산문인협회지부장
임현택 괴산문인협회지부장

 

시도 때도 없이 참새 떼처럼 짹짹 울려대는 핸드폰 알림. 좋은 글모음부터 모임 안내 및 영상까지 주인에게 서면보고하느라 핸드폰은 정신없이 불이 켜졌다 꺼지기를 수차레다.

책상 위에서 연신 울려대는 핸드폰을 애써 외면하려 해도 어느새 손은 화면을 터치하고 있다. 바쁜 손놀림으로 읽어 내려가던 중 때가 때인 만큼 김장하는 사진들이 줄을 잇는다. 어느덧 고정된 시선, 그리움으로 촉촉이 가슴에 비가 내린다.

김장하는 날이면 마당에 모두가 빙 둘러앉아 잘 절여진 배추 이파리에 두툼한 보쌈 한쪽에 양념 소를 얹어 돌돌 말아먹는 그 맛, 잊을 수 없는 그 맛 때문에 한걸음에 달려가곤 했었는데 이젠 그 기억도 까마득히 오래전 일이다. 그런 그림 같은 풍경도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한 세월, 어머니가 계시지 않은 친정의 김장하는 풍경은 더 이상 볼 수 없고 이젠 가슴에만 남아있다.

나이가 들면서 주변 분들이 친정을 간다고 하면 괜스레 풀이 죽고 아린 가슴은 먹먹해진다. 고향도 친정도 없는 것도 아니다. 아버지가 계신 친정이 있지만, 어머니가 계시지 않은 친정엔 따스한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날 오후, 심란한 마음을 달래려 묵은지 김밥을 만들었다. 묵은지의 넓은 겉 이파리 몇 장을 잘라 양념을 씻어 소쿠리에 얹어 물기를 빼고 찰밥을 준비했다. 메밥보단 쫀득쫀득한 찰밥이 김치와 환상적인 찰떡궁합으로 묵은지 김밥엔 완성맞춤이다.

김밥 발 위에 김 대신 묵은지를 쫙 펼쳐놓는다. 묵은지 김밥엔 김이 없다. 묵은지 한 장이면 그만이다. 묵은지 위에 찰밥을 얇게 펴놓고선 참기름에 조물조물 무친 시금치 한 줄, 미각, 시각을 자극하는 계란지단과 당근 한 줄, 그리고 참치 캔의 살코기를 두툼하게 펴놓는다. 마지막으로 그리움을 듬뿍 퍼 담아 묵은지를 돌돌 말아 적당한 길이로 잘라 놓으면 묵은지 김밥이 아닌 묵은지 롤이 완성된다.

온 집안에 퍼진 고소한 참기름 냄새는 미각보단 흐릿한 기억을 더듬고, 참기름 병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길엔 그리움이 인다. 생전 어머닌 가을이면 방앗간에서 짠 참기름을 소주병에 담아 보관하셨다. 김장을 마치고 돌아가는 딸내미들 자동차 트렁크에 김장이며 곡물이며 바리바리 자동차 바퀴가 내려앉도록 잔뜩 실어주셨다. 그리고 또 하나의 검정 비닐봉지, 어머닌 소주병에 담은 참기름을 비닐로 소주병 주둥이를 몇 번을 싸고 또 싸 고무줄로 칭칭 동여맨 후 병이 기울어지면 쏟아진다며 꼭 안고 가라고 당부, 당부하셨다. 어머니 당부에 언제나 참기름 병은 귀한 대접을 받으며 집집으로 갔다.

고기도 놀던 물이 좋고, 병아리도 텃세하는 곳이 고향이고 친정이다. 그래서일까. 가을걷이가 끝나면 참기름이며 들기름이며 김장까지 친정에서 그득그득 싸가지고 오는 주변 분들을 보면, 할머니가 되었는데도 아직도 부럽고 서러움이 밀려오는 건 나만 그럴까? 어머니의 무릎관절로 끙끙 앓던 소리도, 허리를 툭툭 치며 `비가 오려나'날씨 탓을 하시던 말씀이 그때는 그렇게 싫었는데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아련한 그 소리, 내가 할머니가 되어보니 더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그 소리가 또다시 그리움으로 인다.

무성했던 가지마다 떠나야 할 때를 아는 것처럼 곱게 물들던 단풍도 모두가 떨어진 이 겨울, 향수를 한 입 베어 문 듯 가슴에 촉촉이 비가 내린다. 시리고 시린 올겨울, 참으로 추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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