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국가 오명 언제까지 쓸건가
산재국가 오명 언제까지 쓸건가
  • 권혁두 기자
  • 승인 2020.11.22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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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지금까지 1300명 넘는 응급환자를 수술했지만 외제차를 탄 환자는 딱 한 명뿐이었다”. 이국종 교수가 아주대 중증외상센터장을 맡던 2017년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그는 “내가 수술한 응급환자 90% 이상이 산업현장이나 운수업종 노동자, 농민들이었다”고 했다. 그의 말은 OECD(국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산재사고 1위 자리를 수십년 째 고수하고 있는 한국의 불명예와 맞닿아 있다. 한국은 연간 2000명 이상, 하루 평균 7명의 근로자가 일하러 나갔다가 사고를 당해 시신으로 퇴근하는 나라다. 일하다가 부상을 당하는 근로자도 하루 400명꼴이다. 매년 일터에서 응급실을 찾는 사상자가 7만여명에 달하는 데, 그들 대부분이 이 교수 말처럼 외제차와는 거리가 먼 저소득층이다.
그의 말은 정부가 전국 17개 병원에 설치해 운영하는 중증외상센터(권역외상센터)의 실상과도 연결된다. 위급한 환자를 골든타임 안에 이송하고 집중 치료를 받게 해 생존율을 높이겠다는 것이 중증외상센터 설립의 목적이다. 그러나 정부가 지어주고 경영도 지원하는 중증외상센터 대부분이 병원의 애물단지가 되고 있다. 심각한 외상환자들만 받아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과 인력을 투입해야 하는 데 비해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시도때도없이 환자를 받고 고난도 수술도 해야 하는 살인적 격무에 시달려야 하니 근무할 의사도 구하기 어렵다. 센터에 환자가 몰릴수록 적자가 누적되는 구조를 정부는 방치했고, 병원은 센터 운영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는 변명거리로 삼았다.
 2016년 한 안타까운 사고가 중증외상센터의 현주소를 보여줬다. 그해 9월 전주에서 두 살짜리 어린이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다. 아이는 7시간 동안 13개 대형병원의 문을 두드리다 아주대병원으로 이송돼 수술을 받았으나 다음날 숨졌다. 아이를 받지 못한 13개 병원 중 6곳이 정부가 골든아워 안에 생명을 구하겠다며 설립한 중증외상센터였다. 예산을 늘려 중증센터를 확충하고 의료진의 처우를 개선해도 모자랄 판이었지만, 국회는 2018년 중증외상센터 지원예산을 전년보다 10% 삭감했다. 무심한 정부를 설득하고 병원과 충돌하며 고군분투했던 이국종 교수는 ‘현실을 모르는 돈키호테’라는 오명을 쓰고 얼마 전 센터를 떠났다. 그리고 중증외상센터도 세인의 관심 밖으로 멀어졌다.
산업현장에서 안전 의무를 지키지 않아 인명 피해를 낸 사업주를 강하게 처벌하자는 법안이 국회에서 오락가락 하고 있다. 정의당이 발의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위험방지 의무를 다하지 않아 사망 사고가 발생하면 사업주나 경영책임자에게 3년 이상 유기징역이나 최고 10억원 까지 벌금형을 부과하도록 하고 있다. 국민의힘도 거들고 나섰으나 민주당이 소극적이다. 처벌이 과하다며 기존 산업안전법을 보완하자는 입장으로 기울고 있다. 지난 5년간 발생한 사망사고 중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기소된 건은 0.57%에 불과하고 부과된 벌금도 평균 450만원에 그쳤다. 산재사망의 빈발이 수십년간 개선되지 않아 국가적 수치가 된 것은 벌금 몇 푼으로 사망사고를 때울 수 있도록 한 온정주의 탓이 크다. 민주당은 한 번에 3명 이상, 1년 합산 3명 이상의 인명피해를 낸 업주에게만 100억원의 징벌적 벌금을 물리자고 하지만 올해 상반기 발생한 인명 사고 302건 중 3명 이상이 사망한 사고는 두 건뿐이다. 집권당으로써 특단의 대책을 내놔야 할 판에 사업주 처지만 살피고 있으니 진보 쪽으로부터도 핀잔을 듣는다.
1964년부터 10년간 진행된 베트남전에서 전사한 한국군은 4407명이었다. 지금 한국은 매년 국민 2000명 이상이 전사하는 전쟁을 수십년 째 치르고 있다. 약자들만 참전하는 비열한 전쟁이다. 정상적인 나라라면 그 전쟁의 종식을 1차적 국정과제로 삼아야 한다. 외제차를 모는 사람들이 일터에서 일상적으로 횡액을 당하는 나라였다면 어땠을까? 중중외상센터가 실패작이 됐을까? 현장 노동자를 죽음으로 모는 위법행위를 처벌하자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이렇게 산통을 겪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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