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철에 즈음하여
김장철에 즈음하여
  • 신은진 한국독서심리상담학회 회장
  • 승인 2020.11.19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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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그릇에 담긴 우리 이야기

 

운전을 하고 집으로 오는 길, 난전에 좌판을 벌이고 무와 배추 등 채소를 파는 상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쩔뚝쩔뚝 천천히 걸어와 흥정하는 중년의 여인도 보였다. 아, 김장철이구나. 삼삼오오 김장을 하려고 시댁으로, 친정으로 모이는 계절이 왔다.

우리나라는 지구상 유일하게 김장 시즌이 있으며, 집집이 김치냉장고를 보유하고 있다. 김치문화는 그 전통과 우수성을 인정받아 2013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김치 요리는 고려시대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니 천 년의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겨울에 채소를 먹기 위해 시작되었던 김장이 겨울에도 채소가 풍성한 21세기에도 지속되고 있다. 이것이 문화행사인지, 겨울을 준비하는 것인지 의문이 생겨 딴지걸기를 하고 싶어진다. 아마도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김장철에 대해 민감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여자라면 82년생도, 72년생도, 62년생도 다르지 않게 경험하는 것이 있다. 김장을 하러 오라는 부름에 시간을 내야하고, 시간을 낼 수 없는 사람들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 같아 죄책감을 갖거나 죄책감에 대한 반동형성으로 화를 내는 경우도 생긴다. 김치도 식품이니 기호도가 있을 텐데 김치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김장해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여성이 있다. 그러고 보면 김장문화는 여성의 문화인 것 같다.

그림책 `세 엄마이야기(신혜원. 2008)'에는 엄마가 셋 나온다. 엄마, 엄마의 엄마, 엄마의 엄마의 엄마. 엄마는 밭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왔다. 빈 밭을 보고 무엇을 심을지 고민하던 엄마는 인절미가 먹고 싶어 콩을 심기로 한다. 숟가락으로 콩을 심던 엄마는 엄마의 엄마에게 도움을 청하고 엄마의 엄마는 엄마의 엄마의 엄마에게 도움을 청한다. 콩을 키우는 동안 세 엄마의 이야기는 반복된다. 콩을 수확하는 날, 엄마는 인절미를 해먹자 했고 엄마의 엄마는 두부를 만들어 먹자 했고 엄마의 엄마의 엄마는 된장을 만들자 한다. 세 엄마는 인절미와 두부를 만들 콩을 남기고 된장을 만든다. 엄마는 인절미를 먹었을까?

독서심리에서의 책은 평가하고 분석하기보다는 그 책을 보며 경험하는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같은 책을 보더라도 모두 같은 생각과 느낌을 갖지 않기에 저마다 반응은 자신을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된다. 나에게 `세 엄마 이야기'는 재미있는 그림책으로 보이지 않았다. 인절미가 먹고 싶던 엄마의 욕구는 없어지고 할머니의 된장 만들기로 끝나기 때문이다. 이미 만들어진 여성으로서의 길을 따라가라고 강요받는 것 같았으며, 그것을 당연하게 수용하는 것이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욕구를 억압하는 것으로 인식되면서 불편했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서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이야기 했다. 지금도 사회적 환경은 가부장제 문화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조금은 나아졌지만. 그 안에서 여성은 알게 모르게 여성으로 키워지고 살아가면서 젠더로서 받는 억압을 인식하지 못한다. 우스갯말에 건망증이 가장 심한 사람이 여자라는 말이 있다. 출산이 힘들어 다시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하던 여자가 또 아이를 낳고, 시집살이의 고통에 인격적인 어른이 되겠다던 결심은 곧 잊히고 며느리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여자의 삶을 풍자하고 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여성을 폄하하는 문화적 요소들은 넘쳐 난다.

문제는 여성 스스로 억압에 대해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김장하느라 고생했다.'는 말이 억압된 감정을 보상하는 해결책이 되지는 않는다. 엄마가 그러했고 엄마의 엄마가 그러했던 것처럼 여성으로 살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도전에서 스스로를 억압하고 상처받기보다는 자신의 가치와 권리를 찾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해 오는 반응들에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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