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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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6.07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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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무섭던 시절의 상흔
1987년 6월 10일, 나는 그날 서울 명동에 있었다. 그 때만 해도 명동은 우리나라에서 하루 유동인구가 가장 많았다. 때문에 골목 어디에 진을 쳐도 금방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고, 악명높은 백골단의 살벌한 추적에도 산발적인 시위는 하루 종일 계속됐다. 구호를 두 세 번밖에 외치지 못하는 짧은 시간이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흩어졌다 모였다'를 반복했다.

당시 시위대의 무리는 대부분 일반 시민들이었다. 군중에 둘러 싸여 메가폰을 잡은 사람들도 일반인들이었다. 넥타이 부대의 6월 항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바로 전날 연세대 이한열의 죽음이 이처럼 시민들을 거리로 내 몬 것이다.

그날 오후 무렵, 드디어 일이 터졌다. 맞아 죽어도 절대 폭력은 쓰지 말자던 시위대에 방송사 카메라 기자가 걸려 들었다. 여기 저기서 죽여라! 고함이 터지는가 싶더니 카메라가 박살나고 이어 기자가 길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사람들의 분노가 엉뚱하게 취재기자에게 쏠린 것이다. 그 때 폭력의 화신은 단연 백골단(사복경찰)이었는데도 말이다.

그 카메라 기자가 갑자기 몰매를 맞은 이유는 단순하다. 이처럼 격렬하게, 그것도 매일 데모를 하는데도 뉴스에 안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죄가 기자의 몫()이 아님을 알고 있던 나는 군중들을 말렸고, 서로 밀치는 과정에서 상처를 입었다. 바로 그 때, 겨울철 호수의 어름이 깨지는 듯한 섬뜩한 파열음이 들렸고, 곧바로 최루탄이 터졌다. 기자는 위기를 면했지만 대신 나는 날아 든 최루탄 파편에 또 피를 흘렸다. 지금도 내 오른쪽 손등엔 그날 입은 두개의 상처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나는 갑자기 들이닥친 백골단에 꼼짝없이 잡혔고, 그들의 우악스런 손에 질질 끌려가 닭장차에 태워졌다. 차에 타자마자 그곳은 지옥이었다. 과거 학생신분의 시위경험은 차라리 아기자기했다. 직장인이 느끼는 이성상실의 야만성은 더 극악무도했다. 그날 무릎이 꿇린 채 얼마나 맞았는지 나중엔 정말 사람들이 무서웠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이동하면서 한참을 시달리다가 어느 한곳에 내려졌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도심인데도 위치는커녕 방향조차 알 수 없었다. 몇분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곳이 명동과 가까운 종로지역임을 알았다. 밖을 보지 못하고 이동하다보니까 방향을 잃은 것이다. 그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라와 역사도 마찬가지다. 앞을 못보면 방향을 잃는다' 단순하지만 정말 절절하게 느꼈다.

그날 오후 늦게서야 풀려 나 집에 들어 간 나는 밖의 세상과는 다른 별천지의 뉴스를 목격했다. 바로 이날 민정당이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했고, 그 이유가 국가의 발전과 안녕을 위한다는 것이었다. 말못할 허전함과 함께 갑자기 낮에 봉변을 당한 그 카메라 기자가 생각났다. 이 때부터 신문은 넥타이 부대를 조심스럽지만 좀 더 적극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넥타이 부대의 6월 항쟁은 이렇듯 극적이면서도 감성적이었다.

그 때 무서웠던 것이 또 있다.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던 전두환씨의 예의 그 목소리였다. "본인은∼∼∼"로 시작되는 억양은 듣기에도 모골이 송연할 정도였다. 그렇게 겁나던 사람이 백담사로 유배가고 감옥에 들어가기 전엔 왜 그리 순해 보였는지, 또한 그 살벌하던 사람이 감옥에서 나올 땐 왜 그리 유머가 풍부하던지, 참으로 알 수가 없었다. 명동시위에서 넥타이 부대의 일원으로 기자의 폭행을 막았던 나는 그로부터 꼭 20년이 지난 지금, 공교롭게도 기자를 하고 있다. 그것도 알량한 지방지 기자를, 그리고 그 때보다도 넥타이를 자주 매야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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