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단(社稷壇)
사직단(社稷壇)
  •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 승인 2020.11.15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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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 제례를 올리는 단(壇)이다. 이곳에서 제를 올리며 농업 중심국가로서 풍요와 평안을 기원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 때부터 사직단 제도를 도입하여 설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건국과 함께 사직단을 세워 운영하였다. 이러한 사직제도의 정립을 위하여 태종은 전국적으로 각 주부군현의 행정단위마다 사직단을 설치하고 사직의 신에게 제사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조선시대에는 적어도 360여 곳에 사직단이 설치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방 사직단은 입지, 크기, 형태, 형식 등에서 통일되지 않고 지방별로 사직단의 존재양태는 매우 다양했다.

조선시대의 사직단제도는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까지 일률적으로 사직단이 설치되었다. 지방 읍치(邑治)를 구성하는 기본사묘는 3단 1묘이다. 즉 사직단, 여단, 서낭단의 3단과 문묘(향교)의 1묘 체제가 하나로 자리 잡았다는 점이다. 지방의 사직단은 중앙과 지방을 연결짓는 중요한 공간이며 문화장치로서 역할 하였다.

이러한 사직단은 어디에 설치하였을까? 기본적으로 읍치에서 멀지 않은 5리 이내, 특히 진산(鎭山) 부근에 설치한 경우가 많다. 사직단의 입지는 각 지방별로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높지 않은 산의 중턱 혹은 정상부의 전망 좋은 곳에 입지한다. 사직단터 10여 곳의 발굴사례로 볼 때 사직단은 읍치를 기준으로 서쪽이나 서북쪽에 설치되고, 지형적으로 볼 때 낮은 구릉의 정상에 위치하는 경향성을 보이고 있다. 여단은 읍치의 북쪽에 설치되었다.

지방 사직단에는 어떠한 시설물들이 설치되어 있었을까? 사직단은 크게 신주를 포함한 단(壇단)과 단을 두르는 낮은 담인 유(?), 바깥 담장인 원(垣)으로 구성된다. 단에는 각각 네 방향에 3단의 섬돌을 두어 단에 오를 수 있게 하였고, 유와 원에는 네 방향에 문을 두었다. 그리고 제향에 필요한 부속시설을 설치하였다. 중앙의 사직단은 동쪽에 사단(社壇), 서쪽에 직단(稷檀)의 정사각형 단을 별도로 설치한 것과 달리, 지방의 사직단은 사단과 직단이 같은 단에 설치되고 신주를 세우지 않은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한 지방 사직단은 외곽 담장인 원을 두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단(壇) 주변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ㅁ자형 울타리인 유(?)는 제단을 보호하고 외부와의 차단을 통해 제단의 신성성을 부여하기 위해 만든 시설이며, 유로 둘러싸인 공간은 토지와 곡식의 신을 모시는 신성한 공간으로 사직제례의 최대영역이라 할 수 있다.

사직단은 조선시대 읍치경관을 구성하는 필수 경관 요소였으며, 농업중심 사회의 전통사상과 의례, 통치 이데올로기 등이 담겨진 중요한 문화공간이자 역사를 이야기하는 기억의 장소로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사직단과 사직제를 의도적으로 폐기하거나 공원으로 조성함에 따라 우리의 소중한 유·무형적 유산을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해방 후 중앙의 사직대제가 복원되어 제례를 올린 것은 1980년대부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를 통해 볼 때 충북지방의 경우 17개 군현에 사직단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중 사직단을 남기고 사직제를 지내는 것은 보은 회인 사직단(충청북도 기념물 제157호)이 유일하다. 청주와 충주의 사직단 터에는 신사가 설치되어 전통적 가치가 크게 훼손되기도 하였다. 현재 전국적으로 12곳의 사직단터가 고고학적으로 발굴되어 현상이 파악되고 복원되어 제를 지내고 있다. 최근 충북지방에서는 보은 회인 사직단이 정비계획수립(2015년)과 발굴조사(2017년)를 통해 사직단터의 규모와 현상을 확인하고 이를 바탕으로 복원(2020년)하였다. 충북지방에서는 유일하게 조사·복원된 사직단이다. 이곳에서 나라와 국민생활의 편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례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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