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기억
가을의 기억
  • 신미선 수필가
  • 승인 2020.11.11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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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신미선 수필가
신미선 수필가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아파트 단지 모과나무에 봄부터 초록 열매가 매달려 뜨거운 여름을 견뎌내더니 어느새 노랗게 익었다. 대추나무 몇 그루에도 알알이 대추가 영글어 경비원 두 분이 둘러서서 열매를 수확하고 있다. 한 분은 장대를 들어 나뭇가지 사이를 휘젓고 다른 한 분은 떨어진 대추를 주워담느라 분주한 가운데 가을볕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내게 가을의 기억은 낭만보다 노동이었다. 여름내 고추밭에서 고추를 따고 나면 서리가 내리기 전 한 번 더 끝물에 들어선 고추를 수확하고 고춧대를 베어냈다. 물론 큼직큼직한 일들은 모두 아버지가 해내셨지만, 근처에서 자잘한 일들은 늘 주말을 이용해 온 가족이 손을 보탰다. 학교에 가지 않는 일요일이면 평일보다 더 일찍 일어나 아침밥을 먹고 가족 모두 밭에서 땀을 흘렸다.

고추 수확이 끝나가면 이젠 옥수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뜨거운 여름을 견뎌내고 튼실하게 자란 옥수수는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초록은 사라지고 갈색으로 말라 손만 대면 섶에서 서걱서걱 낙엽 밟는 소리가 났다. 그러면 아버지는 낫을 들고 옥수수 섶을 잘라 바닥에 모으고 식구들은 옥수수 통만 따내 집 마루에 쌓아 마지막 수분기를 말렸다. 잘 말려야 곰팡이가 피지 않고 좋은 값에 팔 수 있기 때문이었다.

벼 타작을 하는 날은 온 동네가 잔칫날이었다. 아침부터 동네 아저씨들이 모여들어 서로 맡은 일을 확인하고 논으로 나가면 아낙들은 집 마당에 무쇠 솥을 걸고 음식 장만을 했다. 새참으로 내갈 국수를 채반 가득 삶고 육수를 내고 점심 밥상을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렸다. 그저 밥심으로 일한다는 생각에 고봉밥을 담고 수시로 먹을 음식을 만들어 냈다. 이날만큼은 일 년 농사 중 아버지가 흘린 땀방울이 결과를 내는 날이었다. 볏 가마니를 가득 싣고 경운기가 딸딸딸 소리를 내며 집으로 돌아오면 우리 가족은 모두 아버지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며칠 후엔 자식들 손에 일일이 용돈이 쥐어졌다.

이 밖에도 마당에서 메주콩 타작이 이루어졌다. 콩알이 달아나지 않도록 마당 곳곳에 멍석을 깔고 틈을 막지만, 어김없이 며칠 후 돌아보면 곳곳에서 콩알이 눈에 띄었다. 들깨를 털고 막바지 겨울준비로 김장할 배추와 무를 수확하는 것으로 한 해 농사는 얼추 끝을 맺었다.

언제나 바쁜 가을날이었지만 그래도 부모님은 늘 웃으셨다. 아침이면 가을볕에 마당 가득 멍석을 깔고 옥수수를 널었다가 저녁이면 해가 서산을 넘어가기 전에 거둬들이는 일을 몇 날 며칠 반복해도 힘든 내색을 절대 하지 않으셨다. 잘 말린 옥수수를 팔아 공부 잘하는 오빠의 학자금을 댈 수 있고 여름내 흘린 땀방울을 곳간에 들여놓고 올망졸망 자식들과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으리라 마음도 흐뭇하셨으리라.

지금은 두 분 모두 일에서 손을 놓으셨다. 그래도 종종 그 시절을 회상하시곤 그때가 좋았다고 하신다. 언제나 늘 종종걸음치며 바삐 사는 게 뭐 그리 좋았냐고 되물으면 또 말씀하신다. 당신께서 이른 새벽 밭에 나가면 자식들 학비가 생기고 밤늦도록 일을 하면 남에게 손을 안 벌려도 된다는 것이다. 이른 봄부터 논으로, 들로 종종걸음치며 계절을 겪어내지만, 거둬들이는 수확의 기쁨이란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임을 부모님은 깊어가는 가을날이면 잊지 않고 추억을 소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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