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하는 것들에 대한 위로
소멸하는 것들에 대한 위로
  • 정명숙 수필가
  • 승인 2020.11.0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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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수필가
정명숙 수필가

 

바람 소리에 섞인 들고양이들의 밥 달라는 소리가 요란하다. 사료를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마른 잔디 위에는 산에서 날려 온 낙엽이 수북하고 맺혀 있는 이슬방울은 무거워 보인다.

서리 맞은 일 년 초들도 고개를 숙였다. 반쯤 잎을 떨어뜨린 배롱나무를 스치는 습기 없는 바람 소리는 투명하고 하늘은 파랗다.

자연의 법칙을 근간으로 하는 시간의 흐름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오고 가는 것을 본다. 이 우주상에서는 작은 미물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관조나 명상이 아닌 오로지 계절을 보내면서 스스로 체험으로 알게 된다. 자연의 섭리에 한없이 초라해지는 순간에 밥이 되기 위한 죽음을 본다.

처마 밑에 있는 고양이의 밥그릇 옆에 검은 물체가 놓여 있다. 청설모다. 병들어 죽은 것도 아니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도 아니다. 상처 난 것을 보니 고양이가 사냥해 온 것 같다. 먹고살기 위한 들고양이의 허기를 채워주기 위해 희생당했다. 움직임이 빠른 청설모를 잡아온 들고양이의 민첩함이 경이롭다. 야생에서 살아야 하는 들고양이가 인간이 주는 사료에 길들여지는 게 안타까웠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생을 마감한 청설모에 대한 애도 속에 조금은 안심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생의 원천은 먹는 일이다. 강자의 생명을 잇기 위해서 약자의 삶은 필연적인 죽음을 맞아야 한다. 모든 곡식과 야채, 동물과 생선은 죽어야만 밥상 위에 올려질 수 있다. `잘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고 하듯 먹는 일은 망자 앞에 놓는 사자 밥으로 귀결되니 삶은 늘 죽음의 향연 속에서 이어진다.

몇 년 전부터 고기를 잘 먹지 못한다. 예민해진 소화기관 탓도 있지만, 밥상에 오르기 전 정형사의 칼날에 해체된 살덩이가 맛있는 요리가 되어 밥상에 오르는 과정이 몹시 거슬려서다. 텃밭에 심은 상추 잎을 따거나 풋고추를 딸 때조차도 망설여진다. 씨앗을 뿌리고 때맞춰 물을 주며 기른 것이라도 나름의 생명이 있는 것들이라 맛있게 먹다가도 너무 잔인한 것은 아닌가 하며 멈칫할 때가 잦다.

수많은 생명들이 내 생명을 지탱해 주기 위해 소멸한다. 생존을 위해 억지로 먹는다는 것은 그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다른 것들의 생명을 빌려 내 삶을 이어가는데 바르게 먹고 헛되게 삶을 낭비하지 않아야 한다.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들을 잘 받들고 다스려야 그들에 대한 미안함이 덜 할 듯싶다.

가을이 깊어졌다. 이별 많은 계절이다. 사람과의 만남이 그러하고 자연과 사람의 만남이 그러하다. 이 절대적 진리가 상실감, 혹은 스산함의 느낌으로 다가옴은 모든 대상이 내 생을 이어주는 스승임을 알지 못하는 부끄러움인지 모른다.

감나무에 남겨진 두 개의 주홍빛 감이 새들의 먹이로 몸을 보시 중이다. 그렇게 또 한 계절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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