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정리하며
책장을 정리하며
  •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 승인 2020.11.0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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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올해 둘째까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다소 교통이 불편하더라도 전에 살던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사 날짜가 정해지자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아이들 학령기가 끝났다고 생각하니 살림 곳곳에서 정리의 폭이 컸다.

가장 먼저 두 개의 커다란 책장에서 책들을 꺼내 모두 바닥에 내려놓았다. 두 겹으로 꽂았던 부분까지 있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마어마했다. 차곡차곡 조용히 쌓여 있던 과거가 폭탄이 터지듯 갖가지로 드러났다. 책장은 과거의 창고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읽었던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는 내가 아끼며 여태 끌고 다닌 책이다.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삼중당 문고판으로 글자도 세로로 되어 있고 누렇게 바랜 것을 당시 문방구에서 무료로 나눠줘서 상권을 읽게 되었는데, 나는 중권과 하권을 구하기 위해 시내 서점 몇 곳을 뒤지고 다녔었다. `돌담'이라는 제목의 노트를 열자 친구들과 독서 모임을 하며 함께 읽었던 책의 목록과 이야기 나누던 장면이 생생하게 걸어 나왔다.

교사가 된 첫해 담당했던 방송반 아이들이 준 비디오테이프 영상부터, 수많은 손편지와 선물로 받은 몇 개의 사진 등 나는 학생들로부터 받은 것들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은 간직하고 있었다. 편지 몇 개를 읽어 보았다. 이름 없는 어떤 편지는 어떤 학생의 것인지 알 수가 없어 안타까웠다. 다행히 이름이 적혀 있으면 아주 천천히 뇌 속에서 깨어나오는 영상이 있어 처음에는 아스라이 잡힐 듯 놓칠 듯 희미하다가 그 중 불쑥불쑥 살아나는 것들이 있어 점점 선명해지는 것이었다. 이것을 매개로 여러 장면과 사연들이 연결되어 살아나왔다. 실수도 잦았고 아쉬운 점도 많은 교사였음에도 내가 애썼던 것들과 교사로서 받은 사랑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았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또한, 두 아이를 키운 기록도 여러 가지 저장되어 있었다. 아기 때 처음으로 알아볼 만한 동물이나 사람을 그린 도화지부터 차곡차곡 모아놓은 그림 파일, 한글을 배운 이후 꼬박꼬박 썼던 그림일기, 여러 단행본과 전집들, 버리지 않고 여태 지켜온 소품들에서 아이들을 키운 토양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두 아이의 성장 과정이 생생하게 떠오르며 엄마로서 살아온 나 자신도 돌아보며 부족한 점도 많았지만 나름 많이 노력했다고 스스로 위로도 하였다.

살면서 잠시 멈추었다 갔으면 하고 절실하게 바라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멈출 수가 없었다.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돌아가고 있어 나 혼자 잠시 멈추는 것은 낙오되거나 낭비하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조금 낙오되거나 조금 낭비할 수는 있어도 작정하고 쉬며 뒤처지거나 소모해버릴 수는 없어 허덕허덕 숨차게 뛰어왔다.

이제야 잠시 멈추어 지나온 길을 돌아본다. 과거에 매이지 말라고 하지만, 과거가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과거에 뿌리를 두고 현재가 놓여 있고 그걸 토대로 미래가 이어진다. 책장을 정리하며 시간에 생명이 부여된 듯 내가 지나온 길은 더욱 생생하고 촘촘하게 생명력을 얻었다.

책장에서 바닥으로 흩뿌려진 먼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나의 역사를 며칠 동안이나 정리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길 것인지가 문제였다. 전집들은 묶어서 조카에게 주려고 한쪽에 보관해 두었다. 단행본 중 중고로 팔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류하여 박스 포장해 두었다. 일부는 지인에게 전달하였고 버려야 할 것들은 분리수거장으로 옮겼다. 나의 작고 빨간 꽃. 어렵게 뿌리를 내렸지만, 이제 과하게 뻗은 뿌리들을 적당히 잘라내었다. 조금 가벼워지자 이제야 보이는 것이 있다. 세상 속에 뛰어들어 힘겹게 헤엄친 것도 나의 선택이었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 갈 길도 모두 나의 선택에 달렸다는 것이다.

많이 버리고 가볍게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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