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여 년 만에 깨진 전통
120여 년 만에 깨진 전통
  • 권혁두 기자
  • 승인 2020.11.0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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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미국의 정치인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은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에 세 번 출마해 다 떨어졌지만 의미 있는 전통을 남겼다. 미 대선 역사상 최초로 당선인에게 결과에 승복하는 축전을 보낸 것이다. 그는 1896년 공화당의 윌리엄 매킨리에게 패한 후 “속히 축하의 말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국민의 뜻을 물었고, 그 결과는 곧 미국의 법이다”라는 요지의 전보를 보냈다. 이후 낙선인이 당선인에게 승복 전보를 보내는 것이 지켜야 할 미덕이 됐다. 1944년 프랭클린 루즈벨트에게 진 토마스 듀이를 빼고는 모든 대선 패배자들이 이 전통을 이었다.

“도널드 트럼프는 우리의 대통령이 됐습니다. 우리는 기꺼이 그에게 (미국을) 이끌 기회를 줘야 합니다”. 지난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패한 힐러리 클린턴은 승복연설을 통해 지지자들에게 그를 성원해달라고 말했다. 전체 유권자 투표에서는 이겼지만, 승자가 주(州)에 배분된 선거인단을 독식하는 특이한 선거제 탓에 고배를 마신 힐러리에겐 아쉬움이 큰 승부였다. 그러나 주저 없이 전통을 따랐다.

힐러리처럼 전체 유권자 투표에서 이기고도 플로리다 주에서 수백표 차로 지는 바람에 조지 부시에게 석패한 앨 고어는 “새 대통령 뒤에 나도 함께 서겠다”고 했다. 오바마에게 패한 매캐인도 지지자들에게 “오바마는 역사적인 승리로 본인은 물론 미국을 위해서도 큰일을 했다”며 “그가 더 좋은 나라를 후대에 물려줄 수 있도록 우리의 선의와 노력을 보내자”고 말했다.

이 유구한 전통이 120여 년 만에 깨지게 생겼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7일 미국의 모든 언론이 바이든의 승리를 보도했다는 소식을, 그답게 골프장에서 들었다. 그는 “선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했다고 한다. 개표결과에 불복하고 전방위 소송전을 전개하겠다는 입장을 재차 밝힌 셈이다. 바이든에 대해서는 축하 메시지 대신에 “대통령 행세 하지말라”고 이죽거렸다.

미국 대통령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다. 그의 선택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운 나라는 없다. 동맹국인 우리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만큼 지구촌의 화합과 공영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 따르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트럼프는 세계의 맹주로서 역할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야만적 정치로 일관했다. 무책임한 선동으로 피아를 나누고 그들 사이에 증오를 심는 데 선수였다. 필요하다면 거짓을 진실로 포장해 국민에게 우기기를 서슴지 않았다. 측근의 충언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견해가 다르면 가차없이 내쳤다. 쫓겨난 참모들이 자서전이나 비망록을 써서 옛 주군의 뒤통수를 때리는 불미스러운 풍속 역시 그가 국가에 끼친 해악 중 하나이다.

미국은 그를 백악관에서 퇴출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화약통을 등에 지고 가야 할 처지가 됐다. 막장정치로 일관했음에도 불구하고 트럼프가 바이든 못지않은 득표율을 올렸다는 사실은 미국에 큰 숙제를 던지고 있다. 정의, 화합, 포용, 미래 등의 정치적 가치는 도외시하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맹신과 맹종을 신조로 삼는 유권자들의 출현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브라이언에 앞서 멋진 패배사를 남긴 인물은 링컨에게 진 스티븐 더글러스였다. “당파성이 애국심보다 우선돼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링컨을 새 대통령으로 지지한다”. `정파의 이익이 국가의 우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이 말을 링컨에게 직접 전했다면 브라이언 대신 그가 승복 전통의 효시가 됐을 것이다. 당의 이익 앞에서는 공약도 소신도 양심도 서슴없이 휴지통에 던져버리는 우리 정치판에서 곱씹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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