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에 내리는 비
11월에 내리는 비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0.11.03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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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11월이 시작되는 날, 비가 내린다.

가을 가뭄까지 더해진 걱정과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라는 서러움으로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시월의 마지막 밤'을 <잊혀진 계절>로 보내고 난 후 새로 맞이한 11월에 처연하게 비가 내린다. 색깔로 모습을 바꾼 나뭇잎들은 11월에 내리는 비의 무게를 못 견디고 서둘러 추락해 잿빛 포도(鋪道)를 덮고 있다. 길 위에 떨어진 `낙엽들은 영혼처럼 울지 못한다.'

시월이 지날 무렵 나무는 뿌리에서 줄기로, 또 가지로 이어지는 생명의 흐름을 닫는다. 그리하여 단절의 운명을 맞이한 나뭇잎들은 우주로의 비행을 준비한다. 11월에 내리는 비는 영원으로 향하는 낙엽의 흩날림을 침묵하게 하고 허공에 맴도는 시간을 단축시킨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아서 해마다 10월이 지날 즈음이면 얼마간의 기쁨과 어느 만큼의 좌절, 그리고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고통의 크기를 알 수 있다. 겨우 남았거나, 아직도 남은 두 달 동안 우리는 그동안 엄습해 온 좌절의 고통과 이별의 아픔을 어떻게든 극복하기 위한 간절함으로 맞이하게 되는 11월에 비가 내린다.

메마른 10월을 보낸 뒤 11월에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일흔다섯 늙은 시인의 노래를 읊조린다. 낮은 목소리로.



은행잎들이 날고 있다.

현관 앞에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또 하나의 가을이 가고 있군.



수리 중인 엘리베이터 옆 층계에 발을 올려놓기 전

미리 진해지려는 호흡을 진정시킨다.

해 거르지 않고 한 번쯤 엘리베이터 수리하는 곳.

몇 번 세고도 또 잊어버리는

한 층 계단 수보다 두 배쯤 되는 수의 가을을

이 건물에서 보냈다.

그 가을 수의 세 배쯤 되는 가을을

매해 조금씩 더 무거운 중력 추 달며 살고 있구나.



2층으로 오르는 층계참 창으로

샛노란 은행잎 하나 날아 들어온다.

손바닥에 올려놓는다.

은행잎! 할 때 누가 검푸른 잎을 떠올리겠는가?

내가 아는 나무들 가운데 떡갈나무 빼고

나뭇잎은 대개 떨어지기 직전 결사적으로 아름답다.



내 위층에 사는 남자가 인사를 하며 층계를 오른다.

나보다 발 더 무겁게 끌면서도

만날 때마다 얼굴에 미소 잃지 않는 그.

한 발짝 한 발짝씩 층계를 오른다.

그래, 그나 나나 다 떨어지기 직전의 나뭇잎들!



그의 발걸음이 몇 층 위로 오르길 기다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 집 8층까지 오르는 층계 일곱을

라벨의「볼레로」가 악기 바꿔가며 반복을 춤추게 하듯

한 층은 활기차게 한 층은 살금살금, 한 층은 숨죽이고 한 층은 흥얼흥얼

발걸음 바꿔가며 올라가보자.

<황동규. 오늘 하루만이라도>

11월에는 더 이상 흔들리지 말 것. 마른 10월의 뒤로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다짐한다. 마스크를 쓴 채로 반가운 사람은 기필코 알아차리는 놀라운 능력을 깨우쳤듯이, 가볍지만 외롭지 않고 어렵지만 이보다 더 힘이 들어가지 않는 11월로 살기. “남기면 남의 것 되고 모자라면 내 것 된다.”<황동규. 초겨울 밤에 中> 늙은 시인의 노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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