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현서원에서 만나는 제주도의 역사 충암 김정 선생
상현서원에서 만나는 제주도의 역사 충암 김정 선생
  •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 승인 2020.11.02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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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바다가 없는 충북의 경우 바다가 항상 그립고 아쉽다. 그런데 청주공항에서 45분이면 바다를 훌쩍 넘어서 가장 아름다운 섬 제주도에 도착한다. 우리 충북과 제주도의 인연은 얼마나 될까? 500년 세월을 거슬러 우리 고장 출신의 선비가 `제주풍토록'이라는 책을 남겼다. 제주와 충북의 인연이 참 깊다는 생각을 한다.

지난번 칼럼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 역사상 두 번째 사액서원인 보은의 상현서원(충청북도기념물 제43호)에 제향된 충암(沖菴) 김정(金淨 1486~1520) 선생이 그 주인공이다. 보은 출신으로 1507년 22세에 대과에 장원급제한 후 순창군수를 지내던 충암 김정 선생은 1515년 억울하게 유배를 당하고는 정치에 염증을 느껴 칩거하던 중, 나라의 부름을 받아 마침내 형조판서에 제수됐다.

선생은 정암 조광조와 더불어 미신 타파, 향약 확산, 현랑과 신설, 정국공신의 위훈삭제 등을 추진했다. 위훈삭제란 중종반정의 공신록에서 가짜 공신을 가려내어 이들에게 준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개혁작업이었다. 그러나 충암 등은 기묘사화(1519년)로 혁명세력의 역공을 받아 금산과 진도를 거쳐 제주도에 1520년 8월 유배가 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선생은 한라산 기슭 금강사에 안치된 후 제주 유생들과 교류하며 제자를 양성했다. 특히 제주목사 이운의 부탁으로 한라산 기우제문을 짓기도 하는 등 제주도 지역민의 삶에 깊이 관여했다. 당시 제주도에서는 주민들이 빗물을 받아서 마셨는데, 이를 본 선생은 가락천에 우물을 파서 깨끗한 물을 마시게도 했다. 이 우물이 `판서정'인데 판서를 지낸 선생이 만들어준 그의 공덕을 기렸다고 한다. 1940년대 후반에 허물어진 판서정을 대신하듯, 동문시장 남쪽 산지천 다리 곁에 세워진 안내 표석이 그나마 충암 선생의 자취를 전해주고 있다. 특히 충암 김정 선생은 `제주풍토록'을 남겨서 16세기 제주 섬의 풍토와 문화를 그려낸 기록문화 유산을 남겨서 500년 전의 제주도에 관한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충암 선생이 금산에 유배 시 보은에 있는 병든 노모를 잠시 만나러 간 적이 있었다. 이것을 간신들이 모함을 해서 유배지에서 도망한 것으로 간주되어 사약을 받게 되었다. 선생은 그의 나이 36세에 절명시를 남기고 1521년 10월 제주에서 죽음을 맞아야 했다. 이후 제주의 선비들은 후세에 전해진 절명시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읊으며 충암을 기렸다고 한다. 그 후 조인후 판관이 가락천 동쪽에 충암묘(廟)를 짓고 이어 이괴 목사가 장수당을 건립하였다. 1665년 최진남 판관이 가락천에 있던 충암묘를 장수당 근처로 옮기니 드디어 사(祠)와 재(齋)를 갖춘 `귤림서원'이 세워지고, 1682년 제주 섬에도 사액서원이 처음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사후에 충암은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간(文簡)이란 시호도 받았다. 특히 사림들의 끈질긴 상소로 정조 임금으로부터 충암 종가는 `불천위'의 윤허를 받았다. 불천위란 백성의 본보기가 되는 위인에게 임금이 내리는 은전인데 4대 이후의 조상 신위도 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받드는 일을 말한다.

충암은 보은의 상현서원, 청주의 신항서원, 금산의 성곡서원, 제주의 귤림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대전시 동구 신하동(273-2)에 위치한 충암 종가 일원은 대전시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선생을 생각하면 `때문에'와 `불구하고'라는 말이 떠오른다. 어려운 상황과 여건에도 자신의 주어진 길을 성실하고 묵묵하게 해나갈 때 후세는 인정하고 결국은 역사를 만드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충암 김정 선생을 통해 한번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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