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0.10.27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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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범 나려온다 범이 나려온다 송림 깊은 골로 한 짐생이 내려온다 누에머리 흔들며 양 귀 쭉 찢어지고 몸은 얼쑹덜쑹 꼬리는 잔뜩 한발이 넘고 동이 같은 앞다리 전동 같은 뒷다리 새낫같은 발톱으로 엄동설한 백설격으로 잔디뿌리 왕모래 좌르르르르르 헛치고 주홍입 쩍 벌리고 자래 앞에 가 우뚝 서 홍행홍행 허는 소리 산천이 뒤덮고 땅이 툭 깨지난 듯 자라가 깜짝 놀래 목을 움치고 가만히 엎졌을 때….」

판소리 수궁가 별주부 호생원을 부르는 대목이 요즘 자주 들린다.

무려 2억7000만이 넘는 유튜브 조회수를 기록한 한국관광공사 홍보영상 `한국의 리듬을 느껴보세요'에 사용된 <범 내려온다>는 젊은 국악 그룹 <이날치 밴드>를 세상에 알린 노래다. 그룹 이름 <이날치 밴드>는 조선 후기 8대 판소리 명창 중 한 명인 이날치의 이름에서 따왔다. 남사당 놀이패에서 활동하던 명창 이날치는 서편제의 대표 소리꾼으로 1870년대 흥선대원군의 부름을 받아 어전에서 소리도 했다.

판소리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음악 형식으로 수궁가를 비롯해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흥보가 등 다섯 마당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완창을 하는데 최소 4시간에서 8시간 이상 걸리는 판소리는 소리꾼도 관객도 고도의 음악성과 체력, 그리고 인내력이라는 기본 요소는 물론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는 재미가 필수적이다.

북 하나로 반주하는 고수와 소리꾼 단 두 명만이 무대에 올라 1인극 형태로 펼쳐지는 연희인 판소리는 병풍 하나로 무대공간을 설정할 뿐 3면이 트여 있다. 3면이 막혀 있고 객석을 향한 무대 전면만 열려 있는 서양 전통 연극과 정반대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판소리는 소리꾼(배우) 한 명이 의상과 분장 등 배우에게 아무런 보조 장치가 없고 무대 장식도 없이 연희가 이루어진다. 소리꾼 한 명이 맡는 역할도 많게는 수십 명에 이를 경우도 있을 뿐만 아니라, 역할에 몰입하다가도 물을 마시기도 하고 “너무 힘들다”며 무대를 벗어나기도 한다. 판소리 소리꾼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고, 나레이터가 되어 상황을 설명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관객과 소통한다.

이러한 형식을 20세기 초에 활동한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서사극의 바탕이 되는 소격(疏隔)효과(낯설게 하기)라는 새로운 연극학 이론을 제시했는데, 간단히 설명하면, 그전까지 정설이었던 연극에서의 관객의 몰입을 거부하고 의도적으로 거리감을 갖도록 하는 기법을 말한다.

세계 연극계의 판도를 바꾼 이러한 새로운 이론을 우리는 판소리를 통해 이미 18세기부터 이야기판을 벌였으니, 만약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판소리를 먼저 접했다면 어떤 반응을 했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이날치 밴드>의 음악은 우리 전통음악인 국악을 바탕으로 한다. 이들의 음악 세계는 현대 대중음악의 장르 가운데 얼터너티브 록의 계열로 분류하는데 얼터너티브 록(Alternative Rock)은 펑크와 사이키델릭 록을 기초로 헤비메탈의 사운드와 블루스적 요소를 섞어 자유롭게 연주하는 음악 형식으로 Daum 한국어 사전은 설명하고 있다.

서양 악기인 베이스와 드럼의 변화무쌍한 리듬에 맞춰 듣기만 해도 저절로 몸이 들썩이는 <범 내려온다>에 세계가 열광하면서 BTS와 블랙핑크에 이은 또 하나의 K-팝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다.

말춤으로 지구촌을 뒤흔든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이은 우리 젊은이들의 놀라운 창의력은 고정된 관념의 형식을 과감하게 부숴버리는 재해석에서 비롯된다. 전통의 현대적 재해석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충분히 공존할 수 있고, 세계인의 몸을 들썩이게 하는 힘은 문화원형과 해체, 재창조에서 나온다.

모든 젊은이들의 길이 오로지 대학입시에 초점이 맞춰지고, 전교 1등이 훌륭한 의사의 길로 공공연하게 광고되는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에서 <이날치 밴드>를 비롯해 <씽씽>, <악단광칠>, <두번째 달>등 전통의 소리를 기반으로 세계를 두드리고 있는 퓨전 국악그룹들의 잃어버리지 않은 DNA를 응원한다.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노래 따라 우리들의 어깨도 들썩들썩. 세상에는 신나는 일이 훨씬 더 많다. 우리가 한국인이어서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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