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時空)의 차(差)
시공(時空)의 차(差)
  • 반영호 시인
  • 승인 2020.10.22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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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論
반영호 시인
반영호 시인

 

일어나 보니 5시다. 날이 새려면 1시간은 더 있어야 했다. 추분에서 동지로 가는 중간 시점인 요즘은 6시는 돼야 밝는다. 다시 잠을 청했던 것이 그만 늦잠을 자게 되었다. 낭패다. 바싹 마른 땅콩대를 태우고자 오늘 아침을 기다렸다. 그동안 강풍예보로 미루어 왔었다. 물론 내일이나 모레도 날이 있겠지만, 바가 온다니 꼭 오늘이어야 했는데…. 산과 맞닿은 곳에 있는 밭은 부산물 소각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자칫 산으로 불길이 올라붙을지 모르니 여간 신경 쓰이는 작업이 아니다.

“쾅”하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무슨 무너지는 소리인가 싶어 부랴부랴 잠옷 바람에 나가보니 대 여섯 사람이 골목에 모여 웅성거린다. 차량 사고다. 다가가 자세히 살피다가 깜짝 놀랐다. 내차다. 작지만 내 다리가 되어 주는 예쁜 내 애마가 많이 부서져 있다. 외쪽 백라이트와 범퍼, 그리도 트렁크가 왕창 나갔다. 길바닥에 물기가 흥건한 것으로 보아 주유탱크가 터졌거나 워셔액 배관이 망가진 모양이다. 상대차도 훼손 상태가 만만치 않다. 오른쪽 라이트와 범퍼, 본네트가 망가졌다. 뒤에서 들이받힌 것이다.

운전자는 70이 넘어 보이는 노인인데 한족 다리를 절고 있었다. 부상인가 싶어 다리를 다치셨느냐고 묻자 넋이 나간 당사자는 말을 못하고 부인인 듯한 할머니가 `아니라고, 지금 다친 게 아니고 1년 전 다리 수술을 했다'고 해 안도했다. 운동신경이 둔화된 노인인데다가 다리수술까지 받은 처지이니 운전 부주의다. 그러나 할머니는 충돌과 별 상관없는데 골목길에서 비킬 데가 어디 있다고 앞에서 오던 차들이 비켜주지 않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우리는 우왕좌왕 잘못을 남에게 떠미는 데 급급했다.

사실 나는 이런 사고를 처음 겪는 일이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경찰을 부르는 것밖에는 몰랐다. 모인 동네 사람 중 어떤 이는 내 생각처럼 경찰을 불러라, 누구는 둘이 합의를 해라. 또 어떤 사람은 법무사에 물어보는 게 좋다 등 여러 의견이 나왔다. 그런데 담 너머로 광경을 지켜보던 초등학생이 “보험회사에요”라는 말에 다 같이 놀랐다. 운전을 못 하는 애도 아는 보험회사를 왜 몰랐을까?

보험사에서 사람이 나오면서 일은 쉽게 풀렸다. 모든 것은 보험사에서 알아서 처리해 준다며 내 차를 공업사로 끌고 갔다. 차 사고가 마무리되자 모였던 사람들도 가해 차 사람들도 모두 흩어지면서 나도 안정을 되찾았다. 그렇다. 인사사고가 아닌 걸 감사히 생각해야지.

사건 수습을 마치니 7시가 넘었다. 늦긴 했어도 땅콩대를 태우러 가야 했다. 내 차가 공업사로 갔으니 아들 트럭을 끌고 갔다. 군대에서 경유차 수동기어를 운전했었으니 벌써 40여 년 전이라서 여간 헷갈리지가 않다. 클러치를 밟고 기어를 넣어야 할뿐더러 출발 시는 클러치 놓기와 액셀러레이터 밟기 타임을 조화롭게 운용해야 하는 숙련이 필요한 운전이다.

언덕배기를 올라가고 있는데 위에서 트럭이 내려오고 있다. 이 아침 산중 외길에 웬 덤프트럭인지…. 비탈길에선 내려오는 차가 우선이다. 내가 후진을 해야 하는데 후진 기어를 넣고 우물쭈물하다 그만 핸들을 잘못 꺾어 뒷바퀴가 도랑으로 들어가 버렸다. 급히 1단을 넣고 전진을 하려 하니 시동이 꺼지기를 몇 번. 결국, 덤프트럭에 줄을 걸고 당겨 겨우 도랑에 빠지는 위기를 모면했다.

가만히 그 시간 그 자리를 더듬어 보니 오늘은 운세가 나쁜 날인 모양이라 생각된다. 조금 이르긴 해도 5시에 밭에 나가 그 자리에 없었더라면 사고가 났을 리 없고, 잠시만 일찍, 아니면 조금만 늦게 출발했어도 도랑에 처박힐 뻔 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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