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서정(抒情). 강가에서
가을서정(抒情). 강가에서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0.10.20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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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나는 물 흐르는 소리를 통해 가을이 찾아왔음을 맨 처음 느낀다.

일과처럼 거르지 않는 새벽 산책길에서 어느 순간 무심천과 율량천의 물 흐르는 소리가 차분해지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가을은 어느새 우리 곁에 만연하다.

가을날 시냇물 흐르는 소리는 숙연하다.

천둥과 번개, 때로는 태풍이 몰아치며 거칠게 비가 들끓던 여름을 흐르는 냇물의 소리는 요란스럽다.

때때로 인간이 함부로 구분 지은 경계를 벗어나 강둑 언저리까지 거센 물길로 침범할 때의 물소리는 위험하다.

키가 크거나 아주 작아 땅 위에 납작 붙들린 풀들까지도 한꺼번에 고개 숙이게 하는 시냇물의 몸짓엔 거칠고 두려운 포효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렇게 퍼붓는 빗물이 타고 흐르는 물의 흐름을 따라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치열하게 다툰다.

그러므로 물의 흐름을 타고 울려 퍼지는 우렁찬 물소리는 위대한 생장의 파동이 되며, 결실을 통해 다음 세대로 생명을 이어가는 안간힘이다.

계절을 따라 꽃이 하염없이 지고, 꽃 떨어진 자리에 남은 열매가 하루하루 튼실해질 무렵 무성했던 나뭇잎들의 별리가 준비된다.

푸르게 나뭇잎에 반사되던 여름날의 빛은 붉거나 노란 색깔의 무수한 파장을 세상에 되돌리며 눈을 어지럽히니 사람들은 이쯤 되어야 바야흐로 절정의 가을을 느끼게 된다.

물은 사뭇 달라서 길었던 장마가 지나고 나뭇잎들의 푸른빛이 기울 즈음이면 먼저 알고 속도를 줄인다. 여름보다 훨씬 느려진 흐름에도 가끔 물살을 뒤척이며 윤슬로 빛나던 시냇물은 숨소리마저 멎은 듯 숙연해진다.

나에게 가을은 숨죽여 흐르는 시냇물의 적막에서 비로소 비롯된다.

물은 여름에 비해 한껏 깊이를 낮추고 있다.

치열하게 생동하던 여름날의 숱한 생명들은 아직 막바지 결실을 위해 풍성한 햇살과 서늘한 바람을 향해 힘겨운 손을 내밀고 있을 때, 물은 각박했던 삶의 흔적들을 제 몸 안의 지상에 가지런히 누이며 투명하게 제 몸을 닦으며 차분하게 가라앉고 있다.

가을의 강은 쪽빛 하늘을 그대로 비추는 맑고 고운 수면과 함께 더욱 깊어진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그리고 감당하기 힘들 만큼 점점 더 넓은 곳으로 흐르는 물은 율량천이 무심천과, 그 무심천은 다시 미호천과 만나면서 모래톱이거나 강기슭에 제자리를 내어주면서도 고요하다.

가을에는 소리를 더 낮추고 살아야 한다.

무성하던 온갖 생명들이 이제 각박하고 치열했던 순간들을 하나씩 내려놓는 계절.

조용히 추락하는 나뭇잎처럼, 고단했던 날갯짓을 멈추고 지상으로 내려와 한 차례의 생을 마감하는 고추잠자리의 작별인사처럼 큰 소리를 내지 않고도 다음 세상을 준비하는.

가을은 고요함으로 훨씬 깊어진다. 제 몸의 두께가 한층 얇아졌음에도 가을의 강은 좁은 자리를 다투지 않고 고요하게 흐르고 있으니 어쩌면 그 마음은 훨씬 깊어지고 있을 것이다.

그 깊고 무거운 몸으로 증발하면서도 끝내 바다에 다다르면 「바다가 절벽에 부딪혀 하얗게 부서지는 건/ 발설할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김정수. 비밀의 기둥>을 확신하는 시인의 노래처럼 모든 것을 다 알거나, 다 할 수 없다는 절망과 허전함 또한 그리 안타까운 일만은 아니다.

「새들은 얼마나 가벼운 신을 신었을까/ 바람이나 강물은 또 무슨 신을 신었을까// 아직도 나무뿌리처럼 지혜롭고 든든하지 못한/ 나의 발이 살고 있는 신/ 이제 벗어도 될까 강가에 앉아/ 저 물살 같은 자유를 배울 수는 없을까/ 생각해보지만/ 삶이란 비상을 거부하는/ 가파른 계단/(중략) 이리도 간절히 지상을 걷고 싶은」<문정희. 먼 길> 가을이 깊어지고 있다. 깊어지는 모든 것들의 끝은 결국 저물고 마는 것. 해 저물어 보이지 않는 강가에 앉아 물처럼 고요하게 만나는 깊고 넓은 가을. 그리하여 코로나를 이겨내고 다시 만드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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