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최초의 사액서원 상현서원과 정부인 소나무를 찾아서
충북 최초의 사액서원 상현서원과 정부인 소나무를 찾아서
  •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 승인 2020.10.19 2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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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서원(書院)은 중국 당나라 말 때부터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으나 본격적인 영향을 받은 시기는 송나라 주자가 `백록동서원'을 재건하여 도학학습의 장으로 보급된 이후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제사기능과 학문기능을 갖춘 본격적인 서원은 중종 38년에 풍기군수 주세붕에 의해 건립된 `백운동서원'이 그 시작이다.

청주영덕고속도로 속리산나들목에서 빠져나와 속리산 천왕봉으로 가는 오르막길에 들어서면 아흔아홉 칸이나 되는 부잣집 선병국가옥이 보이고, 조금 더 올라가면 서원계곡이 나온다. 이 계곡의 이름은 상현서원에서 나왔다. 서원이 자리 잡은 이곳 외속리면 `서원리'라는 지명 역시 상현서원에서 기원한다. 충청북도기념물 제43호인 상현서원은 충북에서 처음으로 임금이 내려준 현판을 받았다. 이것을 `사액서원'이라 하는데, 전국에서 경북 영주의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이다.

그런데 원래 상현서원은 이곳이 아닌 삼년산성 안에 있었다. 이름도 `삼년성서원'이었다. 지금의 이름으로 바뀐 것은 광해군 2년(1610) 임금으로부터 상현서원이라는 현판을 받으면서부터이다. 그 뒤 현종 3년(1672)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가 고종 8년(1875)에 `서원훼철령'으로 상현서원도 사라졌다. 당시 서원의 강당 건물은 보은향교로 옮겨 향교 건물로 사용했는데, 지금의 서원 건물은 1949년에 다시 지었다가 1986년에 복원한 것이다.

상현서원은 기묘사화로 사약을 받은 충암(沖菴) 김정(金淨)을 모시기 위해 명종 10년(1555)에 세운 것이다. 사화는 사림 세력이 큰 화를 당한 사건이라는 뜻이다. 조선 중기 이후 관직에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 세력은 이미 정권을 잡고 있던 훈구세력을 비판하였는데, 특히 중종(1506~1544) 때 조광조는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하며 훈구세력을 공격하였다. 그런데 조광조의 개혁으로 기득권을 잃을 위기에 빠진 훈구세력은 조광조가 반역을 꾀했다는 누명을 씌워 많은 사림 세력을 유배 보내거나 사형시켰다. 이 사건을 기묘사화라 한다.

당시 보은 현감이었던 성제원을 비롯한 보은 지역의 유림이 서원 건립을 주도하였다. 그 뒤 처음 모신 김정 외에 성운, 성제원, 조헌, 송시열 등을 추가로 모셔 모두 다섯 명의 위패를 모시게 되었다.

서원 안으로 들어서면 빈터가 있다. 이 빈터는 원래 강당이 있던 자리이다. 그 왼쪽에 상현서원묘정비가 있는데, 여기 걸려 있는 현판에 상현서원 중수기록이 있어 건물의 내력을 알 수 있다. 다시 안쪽에 있는 솟을삼문을 들어서면 상현사라는 현판이 걸린 사당이 있다.

상현서원을 나와 삼기저수지 쪽으로 속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며 좀 더 올라가면 천연기념물 제352호인 정부인송이 서원계곡에 떡 하니 자리를 잡고 있다. 이 소나무의 높이는 15m이고, 줄기는 지상 70㎝ 높이에서 두 개로 갈라져 있다. 갈라진 줄기의 밑 둘레는 각각 3.3m, 2.9m이며, 수관폭은 동서가 23.8m, 남북이 23.1m로서 평균 23.5m이다. 수령은 600년으로 추정된다. 법주사 입구의 정이품송과 내외지간이라고 하는데 정이품송이 곧추 자란 데 비하여 밑에서 두 개로 갈라졌기 때문에 암소나무라 한다.

비대면 온라인 세상이 일상화되는 작금의 현실에 역사 유적지를 직접 찾아가고 만나는 일이 조심스럽기만 하다. 그럼에도 애정어린 마음으로 찾아가는 수고로움이 필요한 시점이다. 직접 찾아가고 만나는 노력과 땀 흘림에서 조상의 지혜와 가르침은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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