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 승인 2020.10.15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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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그릇에 담긴 우리 이야기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백만 번이나 죽고 백만 번이나 살았던 멋진 얼룩 고양이가 있었다. 백만 명의 사람은 그 고양이와 언제나 함께 하며 귀여워했고, 백만 명의 사람은 그 얼룩 고양이가 죽었을 때 엉엉 울며 슬퍼했다.

백만 년이나 죽지 않은 고양이는 임금님의 고양이, 뱃사공의 고양이, 서커스단 마술사의 고양이 등으로 백만 년을 살았다. 고양이는 백만 명의 사람들을 아주 싫어했고 죽는 것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리고 고양이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그런 고양이가 `누구의 고양이'가 아닌 온전히 `자기만의 고양이'가 되었다. 처음으로…. 고양이는 자기를 무척 좋아했다.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고양이는 백만 번이나 죽어 봤기에 많은 암고양이들의 구애에도 기쁘지 않았다. 슬픈 일도 기쁜 일도 없었다.

어느 날, 고양이에게 오래도록 같이 살고 싶은 하얀 고양이가 나타났다. 새끼 고양이들도 태어났다. 자기 자신보다 더 좋아하는 가족이 생긴 것이다. 세월이 흘러 하얀 고양이는 움직임을 멈췄다. 얼룩 고양이는 처음으로 울었다. 밤이 지나 아침이 되고 다시 밤이 되도록 백만 번이나 엉엉 울었다.

그림책, 사노 요코의 <100만 번 산 고양이> 이야기다. 백만 번 산 고양이는 어떻게 됐을까? 엉엉 울다 움직임을 멈췄을까 아니면 여느 때처럼 다시 되살아났을까?

얼룩 고양이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생각 해 보자. 백만 년이란 긴 시간을 누군가에게 속한 `~의 고양이'로 살았다. 백만 번을 살았어도 주체적인 삶이 아닌 주인의 삶 일부분에 속한 생을 살았다. 그러기에 얼룩 고양이는 다시 태어나도 별반 다르지 않은 시간들,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세월을 보냈다. 산 것 같지 않은 삶을 살았던 것이다.

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얼룩 고양이처럼 삶을 살아내진 않았을까? 혹여 내 아이를 얼룩 고양이처럼 대하며 키우진 않았을까? 부모의 말에 순응하는 아이들, 키우긴 힘들지만 부모의 말에 따르지 않고 주도적이길 원하는 아이들을 어른들은 어떻게 볼까? `착한 아이' `말 안 듣는 아이' 라는 틀에 가두려 하진 않았을까? 보면 볼수록 생각이 많아지는 그림책이다.

무엇이 무의미하기만 했던 얼룩 고양이의 삶을 흔들어 놓았을까? 자기만의 시간, 자기만의 삶을 맛보는 순간, 자아가 다져지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자아를 찾기 시작하며 자존감을 키우던 얼룩 고양이는 달라져도 갑자기 너무 많이 달라졌다. 이번에는 자기애가 과하게 충만한 고양이가 되었다. 젠체하고, 자기만 보이는 시기, 즉 관계 맺기에 조절이 필요한 시기가 되었다.

그 단초를 작가는 사랑에서 찾았다. 얼룩 고양이 가슴을 뛰게 하고 삶에 의욕을 갖게 하는 이성에 대한 사랑은 삶을 한 단계 성장하게 했다. 사랑은 일상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변화를 주었다. 일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했다.

진정 사랑하는 고양이를 만나 드디어 진정한 생을 알게 된 얼룩 고양이는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좋을 시간 보냈다. 다시 살아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만한 삶을 살았다. 그렇게 진정한 삶다운 생을 보낸 얼룩 고양이, 백만 번 산 고양이는 어떻게 됐을까?

`하얀 고양이 곁에서 조용히 움직임을 멈췄습니다. 그러고는 두 번 다시 되살아나지 않았습니다.'

삶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는 백만 번을 살았어도 산 것 같지 않았던 삶을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괜찮은 생으로 살게 했다. 우리네 인생에서도 찾아보자! 일상을 사랑하게 했던, 일상을 의미 있게 했던 단초는 무엇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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