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전투 전승 100주년을 맞이하여
청산리 전투 전승 100주년을 맞이하여
  • 허재영 대전지방보훈청 보훈과 선양팀장
  • 승인 2020.10.13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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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허재영 대전지방보훈청 보훈과 선양팀장
허재영 대전지방보훈청 보훈과 선양팀장

 

“어디로 이동합네까?”

“청산리…”

지난해 8월 개봉해 약 480만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 <봉오동 전투>의 마지막 장면이다.

올해는 봉오동·청산리 전투 전승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로 오는 21일이 바로 영화 마지막 대사인 “청산리....”지역에서 펼쳐졌던 청산리 전투 전승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청산리 전투'는 1920년 10월에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군과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 부대가 두만강 상류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워 크게 이긴 전투다.

1905년 을사조약과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이 완전히 상실된 후 나라 잃은 백성들은 북간도로 이주했고, 그곳의 애국 청년들은 김좌진 장군과 함께 북로 군정서라는 무장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했다.

서일을 총재로, 김좌진을 군사령관으로 세운 북로 군정서는 군비와 무기 확충에 힘써 1920년 8월에는 총병력 1600여명, 장총 1800정, 기관포 7문, 대포 3문 등을 갖춘 동북 만주 최강의 독립군 부대로 발전하게 된다.

1920년 6월 봉오동에서 독립군에 크게 패한 일제는 독립군의 활동을 식민 지배의 가장 큰 위협으로 여기고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만주의 독립군을 추격했다.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 연합 부대는 일본군의 움직임을 살피면서 백두산 방향으로 이동하던 중 청산리 일대에서 유리한 지점을 차지하고 일본군에 일대 반격을 가했다.

독립군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백운령, 완루구, 어랑촌 등지에서 이어진 1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5만여 명의 대병력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는데, 이것이 바로 독립 전쟁사에 가장 빛나는 `청산리 대첩'이다.

북로 군정서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일본군 사상자가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 기타 1254명으로 기록돼 있고, 독립군 사상자는 전사 60명, 부상 90명이었다고 한다.

반면, 일본 측 기밀문서에는 일본군 사망자 수가 단지 11명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하니 당시 일본이 얼마나 이 전투를 왜곡·축소하고 싶었는지 알 듯하다.

물론 청산리 전투의 일본군 사상자 숫자는 학계에서도 여전히 논란 중에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일본군 사상자 숫자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일본군에 비해 열악한 무기와 소수의 부대원으로 기적 같은 전과를 올렸다는 사실이 아닐까.

이같이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둔 `청산리 전투'하면 우리는 흔히 김좌진, 홍범도 장군을 떠올릴 것이다.

밝혀지지 않은 승리의 숨은 주역이 있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승리에는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일본군의 움직임을 알려 주고, 식량과 군수품 등을 지원한 간도 동포의 지원도 큰 역할을 했다.

이범석의 `우둥불'에는 `교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굶주림! 그러나 이를 의식할 시간도 먹을 시간도 없었다. 마을 아낙네들이 치마폭에 밥을 싸 가지고 빗발치는 총알 사이로 산에 올라와 한 덩이 두 덩이 동지들 입에 넣어 주었다'라고 기술돼 있다.

청산리 전투는 비단 독립군뿐만 아니라 온 동포가 합심해 얻은 값진 승리였던 것이다.

당시 청산리에서의 대승리는 일제에 우리 민족의 저력을 보여줌과 동시에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청산리 전투 전승 100주년'을 맞아 다시 한번 독립군과 그를 도운 민초들의 숭고한 희생에 감사드리며, 최악의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독립군의 정신을 되새겨 코로나19라는 어려운 상황도 슬기롭게 이겨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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