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경천 살구나무의 죽음
가경천 살구나무의 죽음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0.10.13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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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광양읍 도월리 월평마을의 백씨 집에 큰 살구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이 나무가 얼마나 큰지 신령이 깃들었나 싶을 정도였고 바람이라도 불면 그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이 내는 소리가 꼭 귀신의 울음소리처럼 들릴 만큼 무성했다. 이렇게 무성하게 큰 만큼 열매도 가득 열려 매년 열매를 따다 팔아 백씨네는 부족함 없이 양식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집 할머니는 이 나무를 너무 무서워해 백씨 할아버지께 귀신이 들린 것 같으니 나무를 없애자고 틈날 때마다 간곡히 요청했다. 살림에 요긴한 할아버지가 망설이는 사이, 살구나무가 무서운 할머니의 병은 심해지고 결국 살구나무는 할아버지의 도끼질에 쓰러지고 말았다. 살구나무가 베어지고 백씨네는 다행히 평화를 얻었지만, 살구나무가 죽은 해에 시집간 막내딸이 자식을 낳지 못하는 걱정거리가 생겼다. 친정 근처 백운산 산신령에게 치성을 드리기 위해 제사 준비를 하는데, 어디선가 더벅머리 총각이 다리에 피를 흘리며 다가오더니 솥에 끓어 넘치는 밥물을 상처에 바르면서 자신이 베어진 살구나무의 귀신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상처를 씻기 위한 밥물에 대한 보답으로 아들을 낳게 해주겠으나 10년 뒤에 자신의 보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과연 얼마 후 낳은 아들을 포함해 모두 세 명의 아들을 낳았으나 더벅머리 총각의 원한인지 모두 서른이 못 되어 죽고 말았다.」

전기톱에 잘려 처참하게 죽은 가경천 살구나무 밑동을 보며 떠오른 <살구나무 귀신 이야기(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간추린 내용이다.

나무는 생명이다. 다만 사람들은 나무들이 고통을 호소하지 않는다고 착각할 따름이다.

큰 딸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의 일이니 벌써 20여년을 훌쩍 넘긴 일이다. 딸아이와 함께한 어느 숲 체험 프로그램에서 나는 청진기를 통해 엄청나게 충격적인 첫 경험을 했다.

나무의 줄기에 청진기를 대보니 우렁차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온몸은 전율했고, 그 소리는 마치 넘치는 환희를 주체할 수 없는 심장의 박동으로 여겨지며 나를 벅차게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지금도 나는 청진기를 통해 내 귀를 파고든 나무의 심장박동 소리가 내 심장을 직접 두드리는 감동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사람들은 나무를 함부로 대한다. 그들은 사람이 나누어 놓은 분류체계상 식물에 해당한다. 동물처럼 소리의 형식을 띤 신호체계로 고통이나 절망을 호소할 줄 모르니 다만 사람이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무생물로 취급하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무를 죽이는 일에 생명에 대한 경외심은커녕 일말의 죄책감이나 양심은 자리 잡을 틈이 없다.

학교 진입로를 넓힌다고 수십 년 된 은행나무 여러 그루를 순식간에 싹둑 잘라 내거나, 아파트를 재건축한다고 여러 해 잘 자라 숲을 이룬 나무들을 마구 베어내 결국 폐기물로 만들고 만다. 어디 그뿐인가. 잘라낸 나무가 혹시라도 소생할까 봐 밑동에 구멍을 뚫어 약물을 집어넣기도 하니, 사람이여 얼마나 잔인해 질 것인가.

세상을 노랗게 물들이며 (사람에게)가을을 느끼게 해주는 은행나무에 대한 학대는 또 어떤가. 인간들이 배설한 똥냄새가 난다고 열매가 달리는 암나무는 모조리 제거하는 어리석음이 멸종의 시작이 될 것임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다.

가경천 살구나무 638그루를 마구 베어 낸 사업의 주체 충청북도의 슬로건이 `생명과 태양의 땅'이던 시절이 불과 몇 년 전이다. 그 `생명'과 `태양'은 산업적 발전에만 염두에 둔 것인가. 그리고 나무를 죽인 하천은 그저 큰 비에도 막힘없이 흘러 인간에게 끼칠 것으로 우려되는 물리적 위협을 제거해야 하는 구조물에 지나지 않는가.

코로나19 재앙은 인간이 파괴한 자연에서 비롯됐고 우리는 겨우 1단계로 조정된 희미하고 두려운 숨을 쉬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인류를 자기 파괴에서 구하려는 노력을 통해서 새로운 인류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이 치명적 위협을 통해서만 통합된 인류를 그려볼 수 있다.” 죽은 가경천 살구나무가 <팬데믹 패닉>을 진단한 슬라보예 지젝의 입을 빌려 말한다. 모든 살아있는 것을 존중하라.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정령이 있고, 전설은 현실의 비극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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