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과 친해지려면
노벨상과 친해지려면
  • 권혁두 기자
  • 승인 2020.10.11 19: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올해도 역시나”. “우린 언제나”. 매년 이맘 때면 들리는 장탄식이다. 올해도 노벨상 수상자 명단에는 한국인 이름이 없었다. 현택환 서울대 석좌교수가 화학상 후보로 꼽혔으나 수상은 불발됐다. 이웃 일본 앞에서 작아지는 때이기도 하다. 일본은 지금까지 25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경제학상을 빼고는 전 부문을 석권했다. 그들은 지난해 주요 부품과 소재 수출을 규제해 국내 주력기업들을 압박하며 기술력을 과시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5년 고등과학원을 설립하고 `노벨상 수상을 위한 국가전략적 도전'을 선언했다. 2020년까지 기초과학을 7대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고 호언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11년 기초과학연구원을 출범했다. 설립목적은 고등과학원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유일한 노벨상 수상자는 두 연구원과 무관한 평화상에서 나왔다. 인문·과학·경제학 부문은 철저한 불모지로 남아있다.

우리 청소년들은 국제 수학경시대회나 과학올림피아드에서 단연 독보적 성적을 거두고 있다. 종합성적으로는 1등 아니면 2등이다. 세계 최고의 과학·수학 영재들을 배출한 한국은 노벨상을 예약한 국가나 다름 없었다. 그런데 그 씨앗들이 꽃을 피우지 못한다. 도대체 그 청년 영재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고등학교 때 국제대회를 제패한 영재들은 학문과 연구의 길을 택하는 대신 법대와 의대로 방향을 틀었다. 애시당초 국제대회에 참가한 목적이 서울대 법대나 의대를 가기 위한 스팩쌓기에 있었을 지도 모른다. 국가가 투자하고 운영하는 2개의 과학원도 그들의 세속적 욕망을 꺽지 못했다. 명예욕을 북돋우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척박한 토양에서 노벨상이 자라기는 어렵다.

수상자 수로만 보면 노벨상은 유대인을 위한 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해까지 유대인 수상자가 184명이다. 전세계 인구의 1%도 안되는 민족이 노벨상의 20% 이상을 독식하고 있다. 대표적인 유대인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지식보다 중요한 것이 상상력'이라고 했다. 그의 말은 이스라엘의 학교 강의실에서 실천된다. 세계에서 가장 시끄러운 강의실이 텔아비브에 있다. 이 곳에서는 학생들의 주장과 논리가 난립하고 충돌하는 난장이 벌어진다. 교수의 눈치를 보지않는 치열한 토론이 강의의 요체다.

우리 대학의 강의실은 절간이다. 교수의 낭랑한 목소리가 사찰의 독경소리처럼 울릴 뿐 학생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필사적으로 받아적는, 펜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받아 적은 것을 외워 시험지에 옮기면 학점이 보장된다. 창의력보다 암기력에 승부를 거는 공부는 초등학교에서부터 시작된다. 특목고 진학이 지상과제가 된 나라에서 초등생들은 학원을 돌며 문제를 푸는 기술을 배운다. 공식과 정답을 외울 뿐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건너뛴다. 남보다 두어 학년 정도는 앞서야 하는 선행학습이 필수이기에 문제와 답 사이에서 허비할 시간도 없다. `왜'냐고 묻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교육에서 상상력과 창조적 마인드가 배양될 리 없다.

노벨상을 향한 노정은 과학원이 아니라 교실에서 시작돼야 한다. 4개의 보기 중 출제자가 원하는 답을 골라내는 재주를 배우는 교육에 노벨상이 잉태되지 않는다. 선행학습 없이는 감당못할 교과서를 강요해서 성적순으로 아이들을 줄 세우는 비정한 교육부터 중단해야 한다. 초등학교 6학년의 40%가 수학을 포기한 `수포자'라는 통계도 있다. 많은 아이들이 포기와 좌절부터 배운다. 공부 못하면 낙오자라는 강박에서 아이들을 해방시키고 상상과 사색의 시간을 허락해야 한다. 이미 정해진 답이 아니라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미지의 답을 탐구하는 과정을 추구하는 교육개혁 없이는 앞으로도 노벨상과 인연을 맺기 어려울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