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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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기연 수필가
  • 승인 2020.10.06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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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한기연 수필가
한기연 수필가

 

수술 침대에 누워 있는데 눈물이 소리 없이 흐른다. 수술 전 준비를 서두르는 움직임과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두렵다. 거기에 `뚜 뚜 뚜'하며 울리는 기계음이 공포스럽다. 지금까지 열다섯 번 넘게 수술 방에 들어와 이 모든 것을 혼자 감내한 큰아들의 아픔이 전해지면서 안쓰러움과 미안한 마음이 더해져 눈물이 흐른다.

지난 5월, 부주의로 인해 넘어지면서 손목이 부러져서 수술했다. 그때 고정핀을 박았는데 이번에 제거하는 수술을 했다. 제거 수술 일정을 계획할 때부터 추석연휴를 염두에 뒀는데 다행히 시기가 맞았다. 수술에 대한 걱정보다는 연휴를 오롯이 나만의 시간으로 지낼 수 있다는 설렘이 컸다.

코로나로 인해 상반기에는 수업을 못했지만, 하반기에는 다행히 수업을 하게 됐다. 대면수업을 하기도 하고 온라인으로 실시간 수업이나 녹화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온라인 수업을 준비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는데, 하면 할수록 우리나라가 인터넷 강국임을 실감하게 됐고 경이로운 IT 세상은 놀랍고 흥분되었다. 수술을 앞두고 미리 영상도 여러 편 찍어 두고 수업자료도 만들었다.

한 달 전부터 리스트를 만들어서 준비작업을 했다. 구역을 나누어 며칠 동안 집안 곳곳을 닦고 이불 빨래를 하면서 집안을 정리했다. 거기에 친정 엄마집도 청소를 해야 했다. 남동생이 준 사골을 여러 번 우려내서 끓인 후 먹기 좋게 담아 냉동실에 얼렸다.

할 일은 태산인데 시간은 어찌 그리 빠른지 연휴 며칠 전부터 새벽까지 일했다. 오른쪽 손목이라 수술 후에는 자유롭게 쓸 수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조급해졌다. 서울에 있는 큰아들까지 불러들여서 일을 시켰다. 마음이 바빠서 여러 가지 일을 벌여 놓고 동시에 하기도 했다. 바쁜 중에도 큰 가방 하나를 마련해두고 병원에 가져갈 물건을 생각날 때마다 넣었다. 여행을 준비할 때의 버릇이 어김없이 나왔다. 여행을 가기 전에 커리어를 한 켠에 열어 두고 물건을 던져 놓은 다음에 하루 전에 정리하곤 했다. 기본 준비용품보다 읽을 책을 신중하게 골라서 담는다. 여유 있게 공부할 자료도 챙긴다. 무엇보다 새로 구입한 노트북은 필수용품이다.

이번에는 입원실 자리도 마음에 든다. 4인실이지만 다른 한 분만 입원해 있었고 내 자리는 창가 쪽이었다. 높은 건물 위로 하늘이 보이는 바깥풍경이지만 작은 창문을 열고 바람을 느낄 수 있다. 더 좋은 것은 코로나로 인해 면회객이 병실까지 올 수 없어서 방해받지 않고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 이전의 일상이 힘든 상황에서 나만의 여행길에 오른 듯 5일간 일정을 시작했다.

수술 첫날은 마취가 오랫동안 풀리지 않아 애태우면서도 편의점 도시락을 맛있게 먹었다. 입원 첫 날이라 큰아들이 보호자로 있었는데 커피와 간식을 잔뜩 사 오게 했다. 평소에는 비싸서 못 사 먹는 마카롱도 실컷 먹으며 호사를 누렸다. 보고 싶던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으며 지내는 하루는 여행지에서의 시간처럼 빨랐다.

수술방에서의 두렵던 마음과 큰아들에 대한 슬펐던 기억을 모두 잊은 채 병원에서의 여행을 제대로 즐기는 중이다.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현실 앞에서 좌절하기보다는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아닐까? 아픔을 잊고 회복할 힘을 스스로 찾아 떠나는 여행지는 어디든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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