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분지절(秋分之節)에
추분지절(秋分之節)에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20.10.05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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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낮보다 밤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가을의 한가운데에 와 있다. 우렛소리가 비로소 그치게 되고 동면할 벌레가 흙으로 창을 막으며 땅 위의 물이 마르기 시작한다는 추분지절이다. 옛 속담에 `어정칠월 건들팔월'이라는 말이 있는데 음력 칠팔월이 어정어정 건들건들 지나가 버린다는 뜻이다. 백중날 호미씻이도 끝나고 나면 추수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농촌이 한가해지는 것을 빗대어 이른 말인데 여름내 힘들게 일해 왔던 농부들이 잠시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이다. 또 여름 동안 습기에 눅눅해진 옷이나 책을 햇볕에 말리는 `포쇄曝?'를 하는 시기도 이즈음이다.

지난 주말 식구들이 모두 모여서 벌초를 했다. 남자들이 산소와 뒤꼍의 풀을 깎을 동안 형님과 함께 풋고추 깻잎을 따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들판은 어느새 누렇게 벼들이 익어가고 있었다.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까지도 넉넉해지는 것 같았다. 논에 물을 빼고 나면 농부가 할 건 없다. 그때부터는 오로지 열매 스스로 영그는 시간인 것이다.

그런데 벼가 전부 쓰러진 게 보였다. 바로 옆 논의 벼는 이상이 없는 걸 보면 지난번 태풍에 그런 것은 아니고, 간혹 품종에 따라서 혹은 과유불급이라고 거름이 세면 웃자라 알곡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는 일이 있다고 한다. 아직 초록빛이 역력한 벼가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있는 논도 보였다. 미처 영글지 못한 벼는 태양빛을 빨아대느라 잔뜩 신경이 곤두서 있지만, 백중 안에 이삭을 팼다면 맑은 바람과 가을볕의 기운을 받아 여물기에 아직 충분한 시간이 있다.

추석 지나 한로에 이르면 이제 본격적으로 오곡백과를 수확하는 시기다. 이슬이 찬 공기를 만나서 서리로 변하는 상강 직전까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것이다. 부지깽이도 절굿공이로 쓰일 만큼 손이 모자라고 시간도 부족하다. 오죽하면 `가을 해 작대기로 못 받친다.'라는 말이 생겼겠는가. 추수할 것은 많은데 가을 해는 짧아서 작대기로 해를 받쳐서라도 시간을 붙잡고 싶은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속담이다.

이때에는 단풍이 짙어져 산하가 울긋불긋 물들고, 제비가 남쪽을 향해 떠나간 하늘에 기러기가 모이는 때이기도 하다. 볼 안쪽으로 열매를 양껏 밀어 넣어 얼굴이 서너 배나 부푼 다람쥐가 들락거리는 풀 섶으로 국화가 노랗게 피어날 것이다. 절기에 따라 계절이 바뀌고 자연이 변하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예전에는 달력을 넘기며 세월 가는 걸 알았다. 달력을 보며 그날그날 해야 할 일을 챙기고, 한 주, 한 달 계획했던 일들을 확인하면서 나름 시간을 주도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절기 따라 날씨 변화를 느끼며 시간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듯하다. 그러면서 24절기가 꽤 과학적인 역법이라는 것과 모든 삼라만상은 절기에 맞춰 흘러가고 있다는 순리를 깨닫는다. 오십견을 얻고 나서야 세상 이치를 눈치 채다니 미욱하다 해야 할지 이제라도 깨닫게 된 걸 다행이라 해야 할지.

인생을 한해에 대자면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은 추분지절 언저리 어디쯤일 것 같다. 내 모습은 어떤가. 이 시점에선 무엇을 해야 할까? 추워지기 전에 나 역시 결정을 해야 할 것이다. 서둘러 날개를 정비할 것인지 부지런히 겨울 양식을 비축하는 일에 힘을 쏟을 것인지. 선택은 이제 온전한 내 몫이나 그리 조바심내지 않는 것은 이 또한 순리대로 따르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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