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행
어떤 여행
  •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사무국장
  • 승인 2020.10.04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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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사무국장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사무국장

 

요즘 몸이 말이 아니다. 갱년기 신호탄이라도 되듯이 확 불어난 몸무게는 시작에 불과하다. 매일 필사적으로 챙겨 먹는 영양제 수량만큼 몸은 더디게 반응하고 어떤 날은 붓고, 어떤 날은 온몸이 으스스하고 또 어떤 날은 무기력해져서 종일 졸리기만 하다. 이게 나이 먹는 거구나, 언니들이 말하는 갱년기가 이제 나에게도 찾아오나 하는 우울감에 종종 빠진다. 이젠 뭘 해도 체력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고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말은 젊을 때나 쓰는 말이었던가 하고 있다. 그렇기야 하겠느냐마는 건강관리에 특별히 신경 쓰이는 나이가 된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가끔 되잖게 죽음을 생각하기도 하며 혼자 서글퍼진다.

얼마 전에 우연히 19세기 독일의 낭만주의 경향을 잘 보여준 그림, 뵈클린이 그린 `죽음의 섬'을 본 적이 있다. 섬으로 가는 배 위에 하얀 옷을 입은 사람과 앞엔 하얀 천으로 덮인 관이 있다. 짙고 높고 쓸쓸해 보이는 어떤 섬의 숲에 막 도착하려는 모습이다. 화가에게 죽음은 적요하고 추운 느낌이었다. 개인이 느끼는 죽음의 공포를 어둡고 침침한 풍경을 통해 우울한 염세적인 심리상태를 보여준다나. 내 책꽂이엔 전혀 다른 느낌의 죽음을 이야기한 그림책이 있다.

`여행 가는 날'이라는 제목으로 할아버지의 죽음을 아름답게 표현했다. 그림의 분위기가 봄날 꽃잎이 날리는 분홍 분홍이다. 할아버지에게 어느 날 뽀얀 안개 같은 손님이 찾아오고 할아버지는 반갑게 맞이하며 기다렸다고 말한다. 그리곤 분주하게 여행 가방을 챙긴다. 장롱 밑에 밀어 두었던 비상금을 챙기고 계란을 삶는다. 뽀얀 손님은 이런저런 귀띔을 해준다. 성격이 급한 사람은 태풍을 타고 갔고, 휠체어만 타던 사람은 걸어서 갔다는 … 그리고 여행지에 도착하면 할머니가 마중 나올 거라고 말하자마자 갑자기 할아버지는 발개진 얼굴로 수염을 깎고 묵은 때를 벗기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 할머니가 알아보지 못할까 봐 젊을 적, 사진도 챙긴다. 두 달 전에 먼저 여행을 떠난 앞집 황씨가 바둑연습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말에 바둑책을 챙기며 오랜만에 승부욕이 끓어오르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뽀얀 손님이 슬프지 않냐고 묻자 “슬프기는, 미안하지. 남겨진 사람들이 슬퍼할까 봐 그게 미안해”라고 말한다. 그렇게 할아버지와 뽀얀 손님은 함께 먼 여행을 떠난다.

이 여행이 어떤 여행인지 짐작이 되면서 눈물이 날 정도로 읽을 때마다 뭉클하다. 삶과 반대되는 말, `죽음'그러나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는 극과 극. 아무렇지 않은 듯 죽음을 새로운 곳을 향해 떠나는 여행으로 그리는 모습은 독일 화가의 그림과 느낌이 사뭇 다르다. 죽음이 또 다른 생이 될 수 있고 그리운 이들을 만나는 기쁨이 있다고 생각하면 죽음 또한 삶의 한 과정이란 생각이 든다. 생의 어느 모퉁이를 돌아 죽음의 새 길로 접어드는 느낌은 뭘까. 잠시 상상해보았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일찍이 인간의 존재를 “죽음을 향하는 존재”로 규정했으며,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죽음을 “우리가 뛰어넘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그 앞에서 난파할 수밖에 없는 한계상황 가운데 하나”로 설명한 바 있다. 인류 모두에게 부여된 평등한 죽음이지만 본인만이 겪는 내밀한 경험이다. 그동안 무작정 죽음을 두렵고 무거운 주제로만 생각했던 나는 철없고 어리석었다. 이제 몸이 하는 말을 듣고 고요한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할 때가 온 것을 직감한다. 매일을 사는 실존적 존재로서 죽음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삶을 아름답게 하는 것과 똑같은 의미라는 결론을 얻는다. 나의 죽음이 빛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조심스레 생각해보는 새벽이다. 메멘토 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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