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국수
칼국수
  • 이창옥 수필가
  • 승인 2020.09.28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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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창옥 수필가
이창옥 수필가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이런 날은 따끈한 손칼국수 한 그릇 생각이 굴뚝같다. 국수가 생각날 때마다 찾아가는 식당이 있기는 하지만 온 세상이 코로나19 때문에 마음껏 나다닐 수도 없으니 마음뿐이다. 용기를 내어 밀가루를 양푼에 덜어냈다. 만두를 빚어 먹을 때처럼 반죽을 만들어 치대어 놓고 보니 제법 그럴듯하다. 막상 반죽을 해놓고 보니 어떻게 밀어야 할지 막막했다. 옆에서 칼국수 타령을 하며 지켜보던 남편이 “역시 이창옥씨는 못하는 게 없어”라며 칭찬으로 힘을 보탠다. 그러나 농막에는 반죽을 밀 홍두깨는 고사하고 바닥에 깔고 밀어야 하는 신문지 한 장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얼마 전 마시고 난 길쭉한 빈 포도주병을 홍두깨 대용으로 사용하기로 하고 바닥에는 도마와 커다란 쟁반을 내려놓았다. 어차피 친정엄마처럼 커다랗게 밀 자신은 없었다. 반죽을 아기 주먹만 하게 떼어 동그랗게 만들어 도마에 내려놓고 병으로 조심스레 이리저리 돌려가며 밀어보니 삐뚤빼뚤하지만 제법 그럴싸하게 넓어진다. 둥글게 펼쳐진 반죽 위에서 친정엄마가 환하게 “어이구 우리 딸 기특하네.” 하시며 웃고 계시는 것만 같다.

유년시절 엄마가 칼국수를 미는 날에는 가슴이 콩닥거리며 신이 났다. 밀가루 음식을 먹지 않았던 내가 유일하게 먹을 수 있는 밀가루 음식이 엄마가 해준 칼국수였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국수를 밀어 접어서 썰고 난 후 국수 꼬랑이를 잘라주시면 부지깽이에 걸어 아궁이에 구워 먹는 시간이 너무도 즐거웠다.

엄마가 안방이나 툇마루에 밀가루 포대 종이를 겹쳐서 넓게 펼쳐놓으면 칼국수를 미는 날이었다. 펼쳐진 종이 위에 길쭉하고 넓은 칼국수 전용 칼판과 홍두깨를 꺼내놓고 미리 반죽해 놓은 덩어리를 올려놓았다. 그 모습은 마치 둥근 달덩이가 칼판위에 내려앉은 듯 보이기도 했다. 엄마가 칼판 앞에 앉아 홍두깨를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하면 달덩이 반죽은 어느새 커다랗게 퍼져 포대종이를 다 덮어 버렸다. 그 모습은 엄마가 홍두깨로 마술을 부리는 것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엄마의 마술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엄마는 반죽을 다 밀어 펼쳐 놓고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러 나가셨다. 그러면 나는 넓게 펼쳐진 반죽이 신기해서 슬쩍 손바닥으로 쓸어보기도 하고 내 키보다 큰 홍두깨를 이리저리 돌려 엄마 흉내를 내보다가 반죽에 흠집을 내어 놓기도 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부엌칼을 가지고 들어온 엄마의 마술이 또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커다란 반죽 위에 밀가루를 솔솔 뿌려가며 접고 또 접어 길쭉하게 만들어 놓았다. 엄마 손끝에서 칼이 쓱싹쓱싹 일정하게 움직일 때마다 넓은 고무줄 가닥처럼 길게 국수가 만들어졌다. 나는 엄마의 칼질이 끝나갈 때쯤이면 늘 조바심이 났다. 혹시라도 엄마가 국수 꼬랑이를 남겨주는 걸 잊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이번에는 좀 더 넓게 잘라주기를 바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마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엄마는 피식 웃으며 인심 후하게 끝을 잘라 넘겨주셨다.

엄마의 칼국수는 별 양념도 없는데 늘 맛이 좋았다. 특히 겨울철에 김장김치를 송송 썰어 상에 함께 올려놓으면 뜨끈한 국수위에 섞어 먹는 맛이 밀가루 음식을 먹지 않는 내 입맛에 마술을 부린 듯 술술 잘도 넘어갔다. 누구에게나 그리움을 자극하는 음식 한가지쯤은 다 있으리라. 나에게는 칼국수가 따듯한 그리움을 길어 올리는 마중물처럼 귀한 음식이다. 요즘처럼 몸도 마음도 힘든 시절 그리움도 함께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마음을 달래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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