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나무의 선물
밤나무의 선물
  • 김현기 여가문화연구소장·박사
  • 승인 2020.09.27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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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여는 창
김현기 여가문화연구소장·박사
김현기 여가문화연구소장·박사

 

나는 저녁형 인간이다. 낮에는 일상적 일과 강의로 대부분 시간을 보낸다.

저녁이 되어야 책도 보고 강의자료도 만들며 연락하지 못한 분들과 전화나 문자로 소통한다. 이러다 보니 12시를 넘겨 잠자리에 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골로 이사한 후에는 꽃에 물 주고, 예초기 돌리고, 풀 뽑고 삽질하느라 시간이 더 부족해졌다.

점점 저녁 일들이 많아지고 덩달아 잠자리에 드는 시간도 더 늦어진다. 덕분에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힘들고 낮에는 잠이 부족해 꾸벅거리기까지 한다.

그러던 내가 지난 한 주간은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먼저 일어났다. 저녁형 인간이 갑자기 아침형 인간으로 변한 것이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밀짚모자를 쓰고, 장갑에 토시도 끼고, 장화를 싣고 집게와 바구니를 들고 집을 나선다. 집 옆에 있는 밤나무가 목적지다.

오늘도 알밤이 여기저기 쏟아져 있다. 집게로 하나씩 줍다 보니 어느새 바구니 하나를 다 채웠다. 바람이 요란한 날은 더 많은 밤송이와 알밤이 떨어진다.

하루가 다르게 색깔이 짙어지고 크기도 커진다. 내친김에 예초기로 밤나무 주변을 깨끗이 정리했더니 알밤 줍기가 더 수월해졌다.

알밤 주우러 갈 때마다 웃음이 나온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돌아가신 아버지를 더 닮아 가는 것 같다. 아버지도 이맘때쯤 밤을 주워놓고 우리를 기다리셨다.

커다란 소쿠리에 밤 한가득과 자식을 생각하는 기쁨 한가득을 함께 담아 놓으셨다. 이제는 이 길을 내가 걷는다.

아이들 주고 이웃과도 나누고 좋은 벗들에게도 선물할 기쁨에 새벽잠을 이기고 일어난 것이다.

묵묵히 서 있는 밤나무를 바라본다. 나는 그에게 해 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떨구어 준다.

우수수 몸을 털어 자신이 여름내 키운 소중한 열매를 땅으로 내려 보낸다.

떨어진 알밤을 보면서 구약의 탈출기 `만나'가 떠오른다. 이집트 땅을 탈출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광야에서 배고픔 때문에 아론과 모세에게 이렇게 불평했다.

“아,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 이집트 땅에서 주님의 손에 죽었더라면! 그런데 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왔소?”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 백성은 날마다 나가서 그날 먹을 만큼 모아들이게 하여라.”“이스라엘 집안은 그것의 이름을 만나라 하였다. 그것은 고수풀 씨앗처럼 하얗고, 그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다” 배고픔으로 불평에 가득 찬 사람들에게 하늘의 양식을 비처럼 내려주신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정착지에 다다를 때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다.

오늘도 나는 만나를 거두러 간다. 밤나무가 떨구어 준 알밤이 나에게는 만나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나에게 매년 넘치는 선물을 준다. 40년을 넘기도록, 아니 마지막 순간까지 똑같이 해 줄 것이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는 것은 `선물'이다. 대가를 바라고 주는 것은 `뇌물'이다. 밤나무는 뇌물을 주지 않는다.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자신의 것을 남김없이 털어 내줄 뿐이다. 어디 밤나무뿐이랴 자연에 있는 모든 것이 다 그렇다. 하느님의 사랑법이 오늘 이 밤나무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도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야 한다. 코로나19로 힘겨운 이 시대에 밤나무의 사랑법이 더 필요하다.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만이 우리를 지키는 유일한 방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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