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보다 특권이 문제
숫자보다 특권이 문제
  • 권혁두 기자
  • 승인 2020.09.27 17: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이탈리아 국민들이 국회의원 수를 확 줄였다. 상·하원 의원 수를 각각 36%씩 줄이는 개헌안이 얼마 전 국민투표에서 69.6%의 찬성을 받아 통과됐다. 2023년부터 상원은 315명에서 200명, 하원은 630명에서 400명으로 줄게 된다. 이렇게 단숨에 국회의원을 줄인 나라는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다. 이탈리아 국회의원 수가 많기는 하다. 국민 10만명당 1.56명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0.97명)은 물론 독일·프랑스 등 유럽 주요국을 상회한다. 한국(0.58명)보다는 3배나 많다. 거기다 이탈리아 국회는 부정부패와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다.

의원 정수 감축이 진즉에 이뤄졌어야 할 나라다. 그런데 이 나라의 고비용 저효율 정치구조를 유지시킨 장본인은 국민이었다. 정치권은 그동안 7차례나 의원 감축을 시도했다가 번번이 실패했다. 대부분 국민투표에서 좌절됐다. 정치인들은 의원 수를 줄이고자 하는 데 국민이 허락하지 않은 셈이다. 이번에도 이탈리아 국회는 이미 지난해 의원 수를 줄이는 개헌안을 가결하고 국민(투표)의 추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탈리아 국민들이 후진 정치에 신물을 내면서도 의원수 감축에는 반대해온 이유는 대변자를 잃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의원이 줄면 지역구는 통폐합되고 대의성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미우나 고우나 자신과 지역을 대변해 줄 정치적 대리인은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들에겐 완강했다. 그러나 이번 국민투표에서 바닥난 인내심이 드러났다.

이탈리아는 코로나 사태로 치명상을 입은 나라다. 먹고살기가 더 힘들어진 국민들은 의원을 줄이면 10년간 10억 유로를 아낄 수 있다는 경제논리에 흔들렸다. 코로나에 철저히 무능했던 정치를 응징하겠다는 심판 의지도 작동했다.

이탈리아 의원 감축이 긍정적 평가만 받는 것은 아니다. 인구가 많은 대도시 위주로 지역구가 개편돼 대의 민주주의가 후퇴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선거구가 커지면서 소수정당의 입지가 좁아져 정치 다양성이 떨어질 공산도 높다. 의원이 줄어들면 끼리끼리 담합과 모의가 쉬워져 부정부패가 더 심화할 수도 있다. 이번 변화가 정치권 내부의 개혁을 동반하지 않으면 절감되는 10억 유로가 다른 구멍으로 새 나갈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의원 늘리기에 대한 국민정서는 이탈리아와 우리나라가 정반대다. 앞서 언급했듯 외국에 비해 의원 수가 적은 나라지만, 우리 국민이 이로 인한 대의정치의 위축을 걱정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인구가 줄어들며 지방에는 4개 이상의 지자체를 하나로 묶은 거대 선거구가 허다해 졌지만, 어느 곳에서도 취약해진 대표성을 걱정하는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여론조사에서는 늘 현재의 의원도 너무 많으니 더 줄이자는 의견이 대세였다. 지난해 민주당과 정의당이 연동형 비례대표제 필요성을 강조하며 의원 정수를 조금이라도 늘려달라고 국민에 읍소했지만 여론은 요지부동이었다.

국회의원을 무위도식하는 무리로 간주하는 불신이 뿌리깊어진 탓이다. 문제는 이 불신이 정치권에 쇄신과 분발을 촉구하거나 경종을 울리는 긍정적 동기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반대로 기득권 정치세력의 낡은 체제와 방식을 연명시키는 자양분이 되고 있다. 그들은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국민의힘은 치욕적인 여론을 `국민의 준엄한 뜻'이라고 추켜세우고는 의원 증원에 반대하는 논리로 삼는다.

의원이 많아도 저비용 고효율을 유지하는 나라도 있다. 북유럽 국가들이다.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는 의원 1명이 인구 3만명 안팎을 커버한다. 인구 대비 우리보다 5배나 많다. 그런데도 저비용 구조가 가능한 것은 의원들에게 부여한 특권이 없기 때문이다. 보좌관은 2명 이상에게 1명이 배치된다. 직접 뛸 능력이 없으면 의원 하지 말라는 얘기다. 우리나라는 국고에서 챙겨주는 국회의원 보좌관이 8명이나 된다. 인턴도 있다. 넘치는 보좌관은 의원 아들 휴가연장 청탁 의혹에 연루돼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북유럽 의원들에겐 우리 의원과 달리 가족수당, 자녀학비 보조수당은 물론 평생 월 120만원씩 주는 노후보장 연금도 없다. 그들에게 의원 1명당 연 8억원의 세금을 쏟아붓는 우리나라는 별천지일 것이다. 우리 유권자들이 눈에 불을 켜야 할 곳은 의원 숫자가 아니라 그들이 누리는 터무니 없는 특권 아닐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