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백범일지'를 읽으며
또다시 `백범일지'를 읽으며
  •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 승인 2020.09.21 19: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최근 코로나19로 모든 국민이 힘든 시기를 견디고 있는 상황에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들까지 수난(?)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김구선생의 `백범일지'를 다시 읽었다.

책을 읽는 내내 일제 침략에 격분하여 투쟁하는 청년 김창수에서 구국과 애국의 가치를 이해하는 민족의 지도자 백범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김구 선생이 평생을 바쳐 꿈꾸었던 모든 국민이 행복한 문화의 나라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높은 문화의 힘으로 가장 멋진 나라가 되기를 염원하였던 백범의 애국심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영화 `기생충'을 비롯하여 최근에 가수 BTS의 성과, 그리고 K-팝과 한류가 전 세계의 문화를 선도하는 모습에서 자긍심과 함께 백범 선생이 소망했던 진정한 문화의 나라가 되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백범 김구는 강화도 조약으로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던 바로 그 시기 1876년 7월 11일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김순여의 외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는 창암으로 불렸다.

1892년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하고 그 후 풍수지리학과 관상학, 병서 등을 탐독하였다.

동학에 입도한 후 이름을 창수로 고치고 동학의 지도자로 활약하다 어려운 시기를 만나 안태훈에게 몸을 의탁했고 그때 아들인 안중근과도 인연을 맺게 된다.

을미사변으로 충격을 받고 귀향하던 중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에서 왜병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맨손으로 처단하였다.

이 일로 체포되어 해주와 인천감옥에서 옥살이를 하였고,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사형집행 직전 고종황제의 특사로 집행이 중지되었다. 그러나 석방이 되지 않자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 승려가 되었다가 몇 달 만에 환속하였다.

일제의 감시에도 백범은 기독교에 입교하여 황해도 장연 봉양학교를 세우고 안악 양산학교와 재령 보강학교 교장으로 교육 구국 운동에 헌신하였다.

비밀결사 단체 신민회의 회원으로 안중근의 거사에 연좌되어 해주감옥에 다시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다.

1919년 3·1운동 후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에 취임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사의 일왕 저격, 4월 29일 윤봉길의사의 흥구공원 폭탄거사 등을 주도한 독립운동의 산증인이 바로 백범 김구선생이다. 존경할 인물이 있다는 것은 개인과 나라의 축복이다. 나라가 어렵고 힘들 때 더욱 그리운 인물이 바로 백범 김구 선생이다.

문화의 힘이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의 철학과 사상을 분명하게 가지고 역사와 민족 앞에 당당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기에 백범선생은 일찍이 교육사업에 온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온라인학습이라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교육 현실에 많은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개인의 성공과 자기 성취에만 급급한 이기적인 교육이 아니라 더불어 나누며 살아가는 이웃사랑과 인류애를 실현하는 공부해서 남 주는 제2, 제3의 백범 같은 인물을 키우는 참다운 교육이 더욱 절실한 시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