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가을이 오고 있다
그래도 가을이 오고 있다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0.09.16 18: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여름이 간다. 폭염의 기승도 잠시, 어느 해보다도 지루한 장마로 유난히 많은 비를 뿌렸다. 비는 잦은 태풍과 가세하여 마구 세상에 폭력을 휘둘렀다. 사람들은 자연의 힘 앞에 저항도 못한 채 속수무책이다. 기어이 사람들을 쓰러뜨려 넋을 놓는 틈을 타 훌쩍 떠나고 있다. 곳곳에 수마가 할퀴고 간 자리의 상처가 긴 한숨으로 남는다.

한숨 속에는 물에 잠겨 허물어져 가는 집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사람들의 시름이 들어 있다. 복숭아가 온통 널브러져 있는 밭에 맥을 놓고 주저앉았다는 지인의 애간장도 녹아있다. 한 해의 땀이 밴 논밭이 한순간에 쑥대밭으로 변했다. 가을의 결실을 기대하고 부풀어 오른 농부들은 좌절한다. 엄청난 변화 앞의 누구인들 의연할 수 있을까.

온갖 횡포를 다 부리고 세상을 휩쓸던 여름이 백로(白露) 앞에 시르죽는다. 매몰차게 빠져나가는 여름의 끝. 한숨소리가 깊어질라 멈칫거림도 없다. 초가을 바람이 서둘러 여름을 휘휘 몰아낸다. 코로나로 만연한 시국의 거리두기로 제대로 명절을 쇠지 못할 노인들의 한숨이 한데 섞인다. 자식을 못 볼 서운함이 오죽하랴. 이래저래 탄식만 깊어가는 요즘이다.

울울해지는 나를 달래려 오랜만에 산책길을 나섰다. 자주 나가던 음성천이지만 오늘은 운동이라기보다 산보할 요량이다. 천(川)의 물이 보기 드물게 맑다. 그 요란을 떨고 지나간 뒷모습이라기엔 믿고 싶지가 않다. 깨끗하고 청청한 물소리가 그리도 무서운 수마였다니. 자연의 너그러움도 지나치면 폭우, 폭염, 폭풍 같이 변하는 이치를 받아들여야 함에 숙연해진다.

천변을 걷다 보니 수런수런 말소리가 들려온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딱 마주친 사과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빨갛다. 빨간색이 반가워 혼잣말로 아는 체를 한다. 거친 바람에도 가지의 손을 놓지 않고 견뎌준 인내의 색, 주구장창 내리는 비에 일조량이 턱없을 텐데도 익느라 최선을 다해야 얻어지는 색. 너무도 기특하고 대견하다. 그리하여 주인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사과가 얼마나 고마운지.

사과는 흔들어대는 바람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버텼으리라.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을 게 뻔하다. 가을에 제 몫을 하려 햇볕을 놓치지 않고 빨아들였으리라. 견디고 참아내 열매가 된 단 사과가 사랑옵다. 사람들의 손길이 바쁜 과수원의 풍경을 하뭇하게 바라다본다.

가만, 사과 한 알에 우주가 담겨 있다. 견디는 일은 이미 겨울부터 시작되었을 터. 표피에 닿는 추위를 사력을 다해 이겨내야만 꽃을 피울 수 있다. 꽃으로 머무는 화려한 시간은 짧다. 순간이다. 아프게 열매를 맺어 크기를 키우노라면 어김없이 고난이 닥쳐온다. 병이야 부지런한 주인이 막아주지만 무조건 인내로 버텨내야 할 때가 있다. 비와 바람을 뚫고 고된 계절을 겪어야 제철을 맞는다. 그제야 고운 빛의 사과가 된다.

사과 안에는 나의 우주도 들어 있다. 유년시절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 삶의 고비를 견뎌내야 했던 시간이 보인다. 아무리 죽도록 힘들었던 여름일지언정 참아내면 가을이 오는 법임을 우주는 일깨워준다. “인내는 쓰되 열매는 달다”란 루소의 환청이 던지는 위로도 달달하다. 끝없이 참고 포기하지 않아 닿은 이 지점. 건조하던 내 안에도 행복이 촉촉하게 스며들고 있다.

이젠 괜찮다. 살만하면 되었다. 불행에 당당할 수 있고 행복이 무엇인지 감이 오면 된 것이다. 기쁨이 지나쳐가지 않고 나를 발견한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아직은 사과처럼 보여 지는 건 없다. 그렇다 해도 내일의 꿈을 꿀 수 있어서 좋다. 그러다 보면 나의 우주도 쓴 인내에 대한 단 열매로 답해주지 않을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