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먹으며 - 집 밥에 대한 그리움
라면을 먹으며 - 집 밥에 대한 그리움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0.09.15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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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아내가 다시 밤샘노동에 나서고, 깊은 잠에 이르지 못해 밤새 뒤척인 아침엔 대체로 라면을 끓여 먹는다. “라면은 (닭이나 나무 같은)생명체를 직접 거치지 않고 공장에서 대량생산된다는 점에서, 모든 식품 중에서 가장 공업적이다.”<김훈. 라면을 끓이며> 집에서 부재중인 아내는 밤새 컨베이어 벨트 같은 김치공장에서 누군가의 식탁에 오를 김치를 생산적으로 만들 것이며, 나는 쓸쓸한 아침 끼니를 공업적으로 때우면서 허전한 에너지를 충전하고 있다.

나는 라면을 좋아한다. 밥을 두고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라면을 찾는다. 꼬들꼬들한 면발의 식감도 그렇고, 자극적으로 풍성한 조미료의 기운에서 비롯되는 라면 국물이 내 몸 안에서 일으키는 화학반응이 라면을 거부하지 못하는 이유인 듯하다. 그러니 라면을 먹는(밤샘노동을 위해) 낮잠을 자 두어야 할 시간에 콩나물국이거나, 밑반찬을 만들어 둔 아내의 노고를 나는 배반하고 있는 셈이다. 아내의 부재를 라면으로 때우는 내 속내에는 (아내를)불편하게 하거나, 스스로를 학대하는 속 좁은 옹졸함이 있다. 집 밥을 짓는 노동에서 편안해지기를 바라는 배려는 위선에 가깝고, 충분하지 못한 내 경제적 능력에 대한 한탄이 서려 있을 뿐이다. 코로나19로 물리적(사회적) 거리두기가 습관화되고 있다. 사람들의 섭생도 길어지는 거리두기에 견디지 못하고 달라지면서 부엌의 불기운은 점점 사라지고 있고, 그 자리를 배달 음식이거나 공산품화 된 즉석조리 식품들이 채우고 있다. 생존을 위해 끼니를 거르지 않는 선으로 퇴화하고 있으니, 좀 더 맛있고 보다 보기 좋으며, 얼마나 즐겁게 요리를 할 수 있는지를 궁리하던 풍요롭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날은 언제쯤일까.

지금 우리는 섭생에 있어서만큼은 온통 `금강산도 식후경'의 시대를 건너고 있다. (음식에 대한)기호와 취향은 고려할 수 없고, 그저 `단짠'의 맛에 굴복하면서 `지금 당장'의 코로나에 몰입되고 있다.

라면으로 대표되는 즉석식품과 공산품으로 규격화된 반조리 식품 등 가정 간편식(HMR:Home Meal Replacement)과 배달 음식들은 결과만 있고 과정은 생략된 채 전달된다.

내 아내처럼 공장에서 밤을 새워가며 김치를 만들어 포장을 하는 일은 제품의 생산 단계에 해당할 뿐, 이를 씹어 삼키면서 그들의 수고로운 노동을 기억하는 일은 없다. 따라서 배추와 무, 그리고 고추와 마늘을 포함한 각종 양념의 재료가 되는 채소가 밥상에 올려진 김치의 필수선행조건이라는 생각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러니 인간에게 아무 탈이 없고 그럭저럭 맛도 빠지지 않는 채소로 자라기까지 그 생명들이 온몸으로 기대야 하는 흙과 물, 공기, 햇빛의 찬란함을 기억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모하다. 유난히 길었던 장마와 연이은 태풍, 그리고 병충해로 시름이 깊었던 농부들의 고단함 또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보다 아득하다.

인간에게 먹는 일과 먹고사는 일, 나아가 보다 맛있는 음식으로 진화하는 과정에는 유기물과 무기물의 자연적인 조화와 더불어 농장에서 식탁에 이르기까지 실로 장엄하고 숭고하며 다양한 노동의 가치 사슬이 있다. 굶주림을 면하고, 건강하게 해주는 단계를 지나 기분까지 좋아지는 맛의 세계는 다양한 식재료와 요리, 그리고 만드는 이의 정성 또한 갸륵해야 하는 절대적 과정을 통해 만들어 진다. 공장에서 획일적이고 규격화되어 만들어진 가정 간편식(HMR)은 차단과 격리의 감염병 위기 시대의 대체재가 될 수 있으나, 그로 인한 다양한 창의력과 개성을 방해할 수 있다. 빠름과 편함으로 무장하고 있는 배달음식에는 불안정하고 위험한 특수고용노동의 고단함과 마구잡이로 늘어가는 플라스틱의 재앙이 있다. 반찬의 가짓수는 갈수록 줄어드는 만큼 생각도 줄어드는데, `지금 당장'의 섭생에서 미래는 희망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햇빛과 바람, 흙과 공기와 물의 흔적이 배어 있는, 그리고 농부들의 땀과 눈물, 그리고 다정한 손맛을 기억할 수 있도록 다시 거리가 좁혀지는 세상을 기다리며 집 밥이 그리운 시간. <라면을 끓이며>, “슬프다. 시장기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김훈의 탄식처럼, 젖은 가을은 하마 우리 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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