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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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 혁 두<편집국부국장>
  • 승인 2007.05.3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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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치떼에 농락당하는 농정
권 혁 두 <편집부국장>

여치는 계절을 알리는 풀벌레다. 가을을 제일 먼저 알린다는 이 곤충이 날개를 부벼서 내는 구슬픈 소리는 제법 정감을 담고 있다. 어릴 적에 곤충채집을 숙제로 받으면 흔한 메뚜기로는 성이 안차 여치나 귀뚜라미를 찾아 헤맸었다. 메뚜기보다 작고 가냘퍼서 친근감이 갔던 곤충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여치에 대한 그간의 이미지는 허상이었던 모양이다.

영동군 농민들이 무뢰배로 돌변한 여치들의 공습으로 애간장을 태우고 있다. 수천마리씩 몰려다니며 과일열매와 채소 등을 닥치는대로 먹어치우는 장면을 바라보는 농민들 가슴엔 피멍이 든다. 영화 '대지'에 나오는 메뚜기떼가 연상될 정도니, 농민들이 겪을 당혹감과 낭패감이 실감된다.

더욱 답답한 것은 여치떼의 준동으로 드러난 우리 농정의 현주소가 여전히 낙제 수준이라는 사실이다. 현장에서는 탄식과 고성이 터지는데도 탁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태한 행정이 이번에도 재연됐다.

여치떼는 이미 지난해 6월 똑같은 지역에서 한차례 횡포를 부리며 올해의 재출몰을 예고했다. 충주, 예산 등에서도 피해가 발생했던 만큼, 전문 방제약품 개발이 요구됐지만 농림부와 농촌진흥청 등은 연구·개발은커녕 갈색여치를 해충으로 등록하지도 않았다. 이 살충제, 저 살충제 사용하다가 약효를 보인 한두가지 약제를 추려낸 것이 대책이라면 유일한 대책이었다.

여치들은 올 3월에도 경보를 울렸다. 피해지역의 몇몇 하우스에서 갓 부화한 애벌레들이 발견된 사실이 본보 3월 29일자에 보도됐다. 예년에 비해 2개월이나 일찍 출현했고, 야산에서 농가의 하우스로 번식처가 확대됐다는 점에서 비상이 걸릴 상황이었지만 두고보자는 식으로 지나쳤다.

영동군이 구체적인 방제계획을 세운 것은 지난 18일. 이미 여치들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농가에 방제약을 공급하기로 했지만, 여치떼와 싸우다 지친 농민들이 군청을 찾아와 분통을 터트렸던 지난 28일까지도 약품들은 농정과 사무실 한구석을 지키고 있었다. 농민들이 여치들과 고투하는 동안 본청과 읍·면사무소는 공문을 주고받는 데 시간을 허송한 것이다.

여치떼 극성이 언론에 도배질이 되다시피한 29일부터 수십여명의 공무원이 동원돼 긴급방제에 나서고 있지만, '사후약방문'이라는 빈축을 면치못하고 있다. 한치라도 앞을 봤다면 애벌레가 출현한 3월에 서식처 전반을 토벌하는 강력한 방제작업이 이뤄졌어야 했다.

일선 지자체에만 맡겨두고 사태를 방치해온 농림부나 농촌진흥청, 충북도 등 상급기관의 무관심도 수위를 넘는다. 지난해 여치가 농작물을 먹어치우는 모습이 외국방송에도 보도되며 국제적 관심사가 됐는데도 대책은 고사하고 왜 영동에서도 특정지역에만 출현하고, 어린이들의 채집용 곤충 정도로 인식돼온 여치가 왜 갑자기 농작물을 공격하기 시작했는지, 어떠한 원인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영동군은 불과 10여일 전 한덕수 총리가 9개부처 차관들을 대동하고 민생체험을 했던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농민들에게 FTA 걱정할 것 없다며 푸짐한 지원정책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차관들은 농촌의 삶의 질을 높이고 시장개방에 따른 농업인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한마음으로 뭉쳐 공조하겠다고 호언했다.

그들이 화려한 수사로 농촌에 대한 열정()을 과시하던 그 순간, 지근거리에서는 여치떼들이 농경지를 유린하고 있었고, 그 곳에 농정은 없었다.

정책은 기본적으로 신뢰의 문제다. 입안자, 집행자, 수혜자가 서로에게 믿음을 갖고 함께 가꿔나가야 열매를 맺는 것이 정책이다.

여치들에게조차 농락당하는 취약한 농정이 농민들의 신뢰를 얻을리 없다.

농정이 믿음을 얻으려면 실효도 의지도 의심스러운 정책만 남발할 것이 아니라, 탁상을 박차고 나와 농민과 아픔을 나누는 진정성부터 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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