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한 송이가 주는 위로
꽃 한 송이가 주는 위로
  • 신미선 수필가
  • 승인 2020.09.10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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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신미선 수필가
신미선 수필가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기운이 완연하다. 여름내 열려 있던 창문이 하나둘씩 닫히기 시작하고 아침 출근길엔 어느새 소매가 긴 옷을 챙기게 된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어대던 매미 울음소리가 잦아드는가 싶더니 그 빈자리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로 음색이 바뀌었다. 계절은 이제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중이다.
며칠 전 출근길에 일년생 백일홍을 보았다. 가로수 등나무 아래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채 저희끼리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눈을 맞췄다. 유월이면 꽃잎을 드러내기 시작해 백일동안 화려하게 핀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백일홍, 전에 없이 긴 장마와 태풍을 이겨내고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낸 색색의 꽃송이에 속으로 말을 걸었다. ‘혹독한 시간 속에서 그래도 피어 있구나. 세찬 바람에도 꺾이지 않고 이렇게 웃고 있다니 참 예쁘다.’
지난겨울부터 여름까지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한 생애 못지않게 긴 날들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한 몸을 이루듯 챙겨야 하는 마스크가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더운 여름이라 장시간 입을 가리고 있으면 숨이 목까지 차올랐다. 요양원에 계신 부모님을 구정 이후로 찾아뵐 수 없었고 전화로만 대면하는 시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소소한 만남이 사라진 것에 대한 우울감이 어느 순간 찾아오기도 했다. 파랗게 높아지는 하늘 사이로 한 줌의 바람에 가을이 묻어오는데 우리의 시절에는 언제쯤 계절이 제대로 돌아올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한정된 생활범주에 점점 버틸 힘이 미약해지고 있던 찰나였다. 온갖 먼지와 소음을 뿜고 소음을 일으키며 쉬지 않고 줄을 잇는 차도 옆에서도 백일홍은 울긋불긋 고운 색을 내며 씩씩하게 피어났다. 빗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던 긴 장마철에도 의연하게 제자리를 지켰다. 거센 바람이 두 차례나 휩쓸고 지나갔지만 쓰러질 듯 아슬아슬 흔들리면서도 꽃대를 세워 제 존재를 뽐내고 있었다. 잠깐 서서 바라보는 꽃 한 송이가 오래 여운을 남겼다.
돌아보면 감동을 주는 것이 어디 백일홍뿐이겠는가. 눈으로 들어오는 모든 풍광이 다 배움의 연속이다. 몇 차례 수마가 할퀴고 지나간 상처의 들녘이지만 어느 농부의 구슬땀이 베인 고추밭은 이제 온통 붉은빛이고 쓰러질 듯 가냘픈 들깨 줄기엔 초록의 둥근 잎이 숟가락처럼 매달렸다. 흙더미에 쓰러졌던 벼들이 다시 일어서 이삭을 키우고 여물어가는 풍경을 보노라면 모진 장마와 태풍을 이겨내고 대견하리만치 제자리를 찾아 본연의 임무를 묵묵히 해내는 자연의 위대함에 새삼 고개가 숙여진다.
지금 나를 속박하고 있는 삶의 불편함을 작은 꽃 한 송이를 보며 위로받는다. 아무렇게나 흘려버렸던 보통의 일상들이 이리도 소중한 한때였던가. 깨닫고 나니 돌아오는 앞으로의 시간은 더없이 소중한 날들이 될 것이기에 함부로, 허투루 쓰는 일은 없으리라 다짐도 해 본다.
바람 소리, 맑은 하늘, 그렇게 여름이 가고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 풀잎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한다는 백로(白露)가 지났으니 그간 활짝 열어두었던 창문을 닫고 고요히 안을 들여다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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