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과 생명
시험과 생명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0.09.08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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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나라에서 시험을 치러 실력에 따라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 제도의 시작은 고려 광종 9년(서기 95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과거시험은 노비와 같은 천인이거나 큰 죄를 지은 자 등을 제외하고 누구에게나 응시할 수 있는 파격적인 제도였다. 신분을 가리지 않고 실력에 따라 널리 인재를 등용한다는 평등의 정신이 있고, 그러므로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희망이라는 걸 가질 수 있게 하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관직을 독차지하려는 중앙 관리들의 힘을 견제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망정 과거 시험으로 인해 오로지 가문과 인맥에 국한되었던 인재선발의 시야가 넓어지고, 덕분에 혁신적인 관료들을 여럿 배출하기도 했다. 인류사에 명멸했던 수많은 국가와 호족 등의 단위에서 과거제도가 제대로 시행된 곳은 중국과 한국, 베트남 세 나라에 불과하다. 유교적 전통과 전제적 왕권체제임에도 관료의 역할과 중요성이 지대한 세 나라의 특성이 있다.

한때 문화콘텐츠 기획에 몰입해 있던 시절의 나는, 과거제도가 지닌 평등의 정신과 신분과 지위를 가리지 않는 인재의 발굴이라는 지극히 표면적인 장점의 역사를 첨단 기술이 조화를 이루는 문화콘텐츠로 개발하기 위해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 중국과 베트남 시장에서도 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는데, 지금의 나는 이러한 미완성을 다행으로 여긴다.

“일본 학자들의 글을 읽어보이 모두 정예(精銳)하였다. 대개 일본이라는 나라는 원래 백제에서 책을 얻어다 보았는데, 처음에는 매우 몽매했다. 그 후 중국의 절강 지방과 직접 교역을 트면서 좋은 책을 모조리 구입해 갔다. 책도 책이려니와 과거를 통해 관리를 뽑는 그런 제도가 없어 제대로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 와서는 그 학문이 우리나라를 능가하게 되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示二兒>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두 아들에게 쓴 편지 가운데 일본을 칭찬하는 글이 있다. 아니 일본을 말하면서 과거제도의 폐해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다산이 말하는 `학문'은 창의적인 학문을 뜻한다.

조선의 과거제도는 1894년 단행된 갑오개혁을 거쳐 비로소 폐지된다.

한국장학재단의 2016년 자료를 보면 서울대를 비롯한 서울 소재 7개 주요 대학의 국가장학금 신청자 1005명 가운데 고소득층에 해당하는 9분위, 10분위 자녀가 절반이 넘는 553명으로 나타났다.

시험을 거친 대학진학과 또 시험을 거치는 과정(의사 국가시험)에서 `매년 전교1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학창시절 공부에 매진한 의사(의료정책연구소 자료)'를 만든 건 나라의 비극이다. 그 비극에는 가난한 부모를 둔 가난한 청년들의 절망이 있고, 부모의 소득에 따라 철옹성처럼 견고해지는 절벽이 있다. 한국장학재단의 서울권 주요 의대 재학생 소득분위 조사 자료에 나타난 저소득층~ 1분위(2020년 기준 1인가구 소득 87만8597원 이하) 해당 학생은 1할이 겨우 넘는 106명에 불과하다. 그나마 해당 대학 의대생 가운데 69.4%는 아예 국가장학금을 신청조차 하지 않았으니, 부자 부모와 학교 성적1등 의사는 흔들릴 수 없는 공식으로 이미 확고하다. 가난한 청년들이 올라갈 수 있는 계층 사다리는 벌써 오래 전에 끊어졌다.

정부와 의사 사이의 대치의 현재 상황은 그저 응급환자를 겨우 수술대 위에 올려놓고 힘겨루기를 하는 꼴에 불과하다. 오로지 공부만 전념해 온 명민한 의사들이 돈을 더 버는 것은 그동안 노력의 대가라는 주장이 당연한 것인가. 그들이 생계의 유지를 걱정하는, 곧 생명을 위협받을 수 있는 가난을 아는가.

엘리트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공부 1등 의사'들은 보편적인 존재로 자신들을 대하지 말라고 시위한다. 보편적인 존재에서 멀어질수록 인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들에게 인간성과 사회성은 이제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존엄한 생명이 의료기술에 내맡겨 지는 앞날이 안타깝다.

생명을 갈구하는 환자의 삶은 모든 사람의 삶이 될 수 있고, 그 생명을 살리는 일은 오직 사람을 통해서만 뚜렷해진다. “나라를 지키는 일에 곧이곧대로 미덕을 지키기는 어려움을 명심해야 한다”는 <군주론>의 말은 의사, 혹은 정부 중 누구에게 해당할까. 이 지독한 감염병의 시대에, 그리고 국민의 생명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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