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 한 병
막걸리 한 병
  • 김경수 시조시인
  • 승인 2020.09.08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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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경수 시조시인
김경수 시조시인

 

어둠이 깃들 무렵 동네 작은 식당 문이 스르르 열렸다. 웬 노인이 반질반질한 대머리를 슬그머니 들이밀더니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 웃었다.

술영감이었다. 그는 검지를 치켜들고 막걸리 한 병을 작은 소리로 외쳤다. 식당 주인이자 그와 연배가 비슷한 박사장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외상이냐고 퉁명스럽게 쏘면서 쓴소리를 던졌다.

그는 상기된 얼굴로 횡설수설 변명하기 시작했다. 박사장은 귀가 따가웠다. 어차피 안 줄 것도 아닌데 오히려 빨리 주고 보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가 가고 난 뒤 박사장은 심술이 난 듯 술문어라고 놀렸다. 그때부터 그가 술영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박사장도 실제 그의 이름을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날 그가 불쑥 나타나 이웃에 산다는 이유로 막걸리 한 병을 외상으로 가져가면서 알게 되었다. 그는 고희쯤 되어 보이는 홀로 사는 가난한 노인이었다. 그런데 수입도 없으면서 매일 같이 막걸리 한 병을 애걸하며 외상으로 마셔야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술값 때문인지 몰라도 그 동네 사는 아이에게 몇만 원을 빌렸다가 그 돈을 갚지 못해 곤욕을 치르며 망신을 당한 적도 있었다. 또한 박사장이 그를 미워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번에 정부에서 돈이 나오게 되자 그는 한동안 식당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박사장은 그가 그 돈이 다 떨어지면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아닌게아니라 그 돈을 다 썼는지는 몰라도 얼마 후 그가 다시 나타나 막걸리 한 병을 애원하며 외치듯 소곤거렸다. 박사장은 그를 보면서 기가 차서 웃기까지 하였다. 그러면서 박사장은 그의 밉상을 동정하는 것인지 속 깊은 배려인지 알 수 없으나 왠지 세상일이 돈으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닌 듯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보이지 않았다. 몇 날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갈수록 궁금해서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그를 본 사람이 없었을 뿐 아니라 관심도 없었다. 박사장은 외상값을 떠나 괜시리 그가 보고 싶을 때가 있었다.

제법 시간이 흘러 박사장의 기억 속에서도 멀어질 무렵 이슥한 밤에 누군가 식당 문을 열며 막걸리 한 병을 외쳤다. 그였다. 박사장은 순간 반가움에 앞서 그간 소식이 궁금했다. 그는 고향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박사장에게 그동안 무척 보고 싶었다고 했다. 겨우 막걸리 한 병의 인연으로 그새 이웃이라고 미운 정이라도 든 것일까? 딱히 말은 없어도 눈빛으로 서로의 그리움을 알 것 같았다. 또한, 글썽거리는 그의 눈동자에 말 못할 아픈 진실 하나쯤은 숨어 있는 듯했다.

우리 주변에는 각양각색의 여러 사람이 있다. 밉든 곱든 모두가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의 이웃이다. 그러므로 그 이웃이 하찮고 보잘것없는 존재라 하더라도 가벼이 여기거나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이웃이라는 존재는 어찌 보면 관심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보아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관심이 없다면 이웃이란 그저 피상적으로 스쳐가는 바람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웃은 늘 관심을 둬야 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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