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엄쉬엄
쉬엄쉬엄
  • 이창옥 수필가
  • 승인 2020.09.07 20: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이창옥 수필가
이창옥 수필가

 

장화를 벗었다. 맨살에 닫는 흙의 느낌이 낯선지 발바닥이 긴장을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디뎌 꽃길로 들어섰다. 꽃길이라고 해봐야 아직은 볼품도 없고 군데군데 피어 있는 봉숭아와 분꽃 채송화 샐비어가 명색이 꽃길의 체면치레를 해주는 정도다. 작은 돌멩이들이 발바닥에 밟히며 자그락거린다. 움찔움찔 미세한 고통이 전신으로 흐른다. 잠시 멈춰 장화를 도로 신을까 고민하다 다시 한발을 내 디뎌본다. 이번에는 좀 더 큰 돌멩이를 밟았는지 나도 모르게 비명이 나왔다. 그렇게 한참 꽃길을 쉬엄쉬엄 왔다 갔다 걷다 보니 요령도 생기고 돌멩이를 밟아도 견딜만해 지고 평온해졌다.

서너 평 남짓 텃밭을 가꾸기 시작했을 때 제일 먼저 시장에서 만 원을 주고 산 빨간 장화였다. 풀숲을 헤치고 다니기에는 장화만 한 것이 없다는 소리를 누군가에게서 들었기 때문이다. 텃밭이나 편백나무를 심은 언덕을 장화를 신고 다녀보니 혹시나 뱀이나 벌레들이 있을까 봐 두리번거리며 주저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편안해졌다. 그 이후로 밭에 갈 때면 으레 장화부터 찾아 신고 몸의 일부인 듯 움직였다. 무엇보다 두려움 없이 온 밭을 누비고 다닐 수 있어서 좋았다. 장화는 내 발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다. 그런 장화를 꽃길에서 벗었다.

남편은 농막을 짓고 편백나무가 심겨진 언덕 위 끝자락에 오솔길처럼 길을 내더니 양쪽으로 작은 돌들을 쌓아 보기 좋게 만들었다. 그러더니 좋아하는 꽃 마음대로 심으라며 세상에 아내한테 꽃길을 선물하는 남편은 자기밖에 없을 거라며 큰소리를 쳤다. 더불어 앞으로는 꽃길만 걸으며 쉬엄쉬엄 살아보잔다. “쉬엄쉬엄”은 내가 최근 들어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이었다. 그들은 한 마음인양 그동안 열심히 살았으니 이젠 쉬엄쉬엄 해도 된다고 했다. 어쩌면 쉬엄쉬엄은 열심히 살아온 이들이 듣고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몸으로 일하는 노동의 강도를 낮추고 늘 아등바등하며 쫓기듯 살아온 마음의 부담도 덜어내고 그 누구도 아닌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도 된다는 또 다른 의미이기도 할 터였다.

그런데 요즘 우리 부부는 몸으로 하는 일이 오히려 많아졌다. 가게에서는 그렇다 치더라도 쉬어家에 와서도 집의 이름이 무색하리만큼 일을 하고 있다. 꽃을 심고 온갖 채소씨앗을 뿌리고 잡초를 뽑고 베어내느라 더 바쁜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그럼에도, 오히려 몸과 마음의 무게가 날아갈 듯 가벼워지는 신기한 경험을 즐거워하고 있다.

“쉬엄쉬엄”의 의미는 결코 거창한 게 아니고 장화를 벗고 꽃길을 맨발로 걸으며 발에 밟히는 돌멩이들과 흙이 들려주는 땅의 숨소리에 귀를 열고 있는 이 시간과 열심히 땀 흘려 일하고도 날아갈 듯 가벼움을 느끼며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쉬엄쉬엄”이 아닐까 싶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