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선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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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진희 기자
  • 승인 2020.09.06 19: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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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공진희 진천 주재(부장)
공진희 진천 주재(부장)

 

막사 뒤편으로 집합을 당한 졸병 대 여섯이 머리를 땅에 박고 열중쉬어를 하고 있다.

소대 군기반장의 발길질이 `쫄따구'들의 가슴에 북 장단을 맞출 때 지나가다 이 광경을 목격한 고참과 부사관이 추임새를 넣는다. `하여간 조선X들은 맞아야 된다니까'

발길질은 그닥 아프지 않았지만 그 추임새가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도대체 이 망할X의 가학근성은 언제부터 대물림된 거야?'

분노가 허탈로 바뀔 때쯤 언뜻 중학교 시절이 생각났다.

어느 날 우연히 같은 반 육상부 친구를 도와 육상트랙 선을 긋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 친구는 소년체전에 여러 번 출전해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었다. 육상부 후배들과 땀을 뻘뻘 흘려가며 학교 운동장에 선 긋는 작업을 했다.

작업을 마치고 그 친구가 육상부 후배들을 집합시켰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후배들에게 기합을 주었다.

후배들에게 미안해진 내가 `애들 수고했는데 좀 쉬게 하지그래'하자 `그전부터 이렇게 해왔어'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기합과 `빠따'를 통해서 선후배 간의 위계와 기강이 확립된다는 말이었다.

2002 한일 월드컵 영웅인 반지의 제왕 안정환 선수가 얼마 전 TV 프로에서 고교선수 시절 일화를 털어놨다.

어느 날 연습을 하던 중 축구공이 선배의 머리를 맞히자 연습이 끝난 뒤 그 선배가 후배들을 집합시켜 왜 그 공으로 내 머리를 맞췄느냐며 괴롭혔다고 한다.

며칠 전 친구들과 이 얘기를 안주 삼아 손흥민 선수에 대해 이야기했다.

70m를 질주하며 성공시킨 이른바 원더골에 대한 찬사는 뜻밖에도 한국 스포츠계에 대한 성토로 이어졌다.

`만약 손흥민 선수가 우리나라에서 성장했다면 그 정도 기량을 발휘하기가 어려웠을 거다. 왜 선배한테 패스 안 하고 네가 슈팅했느냐고 야단치며 버릇없다고 한참 혼냈을 것이다'가 그날 남자들 수다의 대세였다.

철인3종 故 최숙현 선수가 수차례 `SOS'에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비극적 선택을 한 지 어느덧 두 달이 넘었다.

한국 스포츠계 폭력의 대물림은 왜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선수들은 성적지상주의를 근본원인으로 꼽는다. 성적에 따라 상급학교 진학은 물론 선수와 소속팀에 대한 대우가 달라진다. 좋은 성적을 내겠다는 목표 아래 감독과 코치 등 지도자의 권한이 막강해진다.

강압적 훈련과 폭력, 폭언이 묵인된다. 이 과정에서 지도자에 대한 문제가 불거지면 선수들의 진로, 팀의 장래와 연계되어 이 사실을 쉬쉬하며 넘어가기 쉽다.

폭력사실을 신고하면 이 사실이 가해자 측에게 유출되는 사례가 많다.

학습효과를 경험한 선수들은 어차피 시정되지도 않을 일에 문제를 제기해 배신자로 낙인찍혀가며 보복과 왕따의 멍에를 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군대의 소원수리와 겹쳐진다.

2017년 9월 27일 진천선수촌 개촌과 함께 대한민국은 스포츠 강국을 넘어 스포츠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천명했다.

처벌 강화와 인권 보호를 골자로 한 이른바 `최숙현 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고 스포츠 윤리센터도 지난 5일 첫발을 뗐다.

프로야구 NC다이노스는 학교폭력 논란에 휩싸인 고교 투수의 지명을 철회했다.

프로야구에서 구단이 신인 선수의 지명을 철회한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다.  이제 폭력과 스포츠가 한솥밥을 먹던 시대와 작별을 고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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