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다리
바람의 다리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0.09.01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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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붉은빛이 도는 돌다리다. 천 년의 세월을 지탱해온 단단함에 숙연해 지는 순간, 무엇이 그리 바쁜지 바람이 내 머리를 헝클고 지나간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바람이 낸 길을 따라갔다. 욕심일까. 바람을 따라간다는 게. 어느새 바람은 농다리를 건너 용마루 성황당 앞에서 숨을 고르고 있다. 정신없이 따라간 언덕배기에서 턱까지 차오른 숨을 할딱이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바람은 물 위로, 좁은 오솔길로, 산으로 자신의 길을 만들며 다니고 있었다. 그런 것을 어찌 따라간다고 허둥대었는지 모르겠다.

언제나 그랬다. 따듯한 사람을 보면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뒷모습도 그 끝이 어떤지도 생각지 않았다. 보는 것이 다일 것이라고 믿고 의지했다. 끌고 가면 가는 대로, 멈춰 서면 같이 멈춰 서곤 했다. 그렇게 언제나 모든 인연의 앞에서 망설이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사람이 무서웠다. 진실일 거라고 믿었던 것이 거짓으로 판명이 나고, 가슴에 하나 둘 멍이 들곤 했다.

벽을 쌓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돌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순간순간 상처를 입으면 입을수록 더욱 단단해지고 견고해져 갔다. 높아져 가는 돌들을 보면서 한숨을 쉬기도 하며 허물어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그래서 가끔은 몇 개씩 내려놓기도 했다. 하지만, 돌을 쌓는 일은 계속 되었고 어느새 높게 쌓인 돌담들은 세상으로부터 나를 가두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나 자신이 세상 전부라고 믿는 아집 투성이의 괴물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허물 수 없을 것 같았던 돌담이 요즘 차츰 낮아지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람 때문이다. 언제나 그런 거라고, 세상은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만지는 것도 아니라고. 그저 저 깊은 마음속으로 느끼며 살아가야 한다고 바람은 내게 낮은 음성으로 가르친다. 그리고 언제나 그 바람이 불어오는 곳엔 그리움의 모습을 한 사람이 함께 서 있었다. 그는 무섭기만 했던 사람과의 인연을 그리움으로 만들어 주었다. 때로는 아주 큰 돌도 서슴없이 내려놓게 했다. 저만치서 기다려 주기도 하고 어느 순간엔 서슴없이 달려와 힘든 내 등을 두드려 주고는 다시 바람이 되어 떠나곤 했다.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그 바람이 그리움이란 선물을 준 셈이다.

용마루에 올라서니 바람은 어느새 드넓은 겨울 초정지에서 찬바람을 일으키며 쌩쌩 달리고 있었다.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내게로 달려와 물 냄새 가득 품은 채 등을 힘껏 밀어준다. 단숨에 초롱 길로 접어들었다. 초정지 둘레길인 초롱 길을 자분자분 걷는다. 바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서성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세상사 모든 것이 바람의 손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는 듯하다.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도, 내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이 사람도, 모두가 바람이 다리가 되어 이어 준 것이란 생각이 든다. 바람은 그렇게 온 마음을 내어주고도 웃는다.

어느새 매섭게 변해 버린 바람이 어깨를 겯고 가는 우리의 등 뒤에서 발걸음을 재촉하게 한다. 문득 서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을까. 그곳엔 이른 낮달이 수줍게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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