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의 역사와 함께한 `치수'의 흔적들
충북의 역사와 함께한 `치수'의 흔적들
  • 박종선 충북도문화재연구원 기획연구팀장
  • 승인 2020.08.27 19: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타임즈 포럼
박종선 충북도문화재연구원 기획연구팀장
박종선 충북도문화재연구원 기획연구팀장

 

기나긴 장마가 지나갔다. 54일에 달하는 역대 가장 긴 장마다. 1987년 이후 가장 늦게 끝난 장마로, 우리에게 큰 피해를 줌과 동시에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을 남겨주었다.

문명이 아무리 발전한다 한들 자연 앞에선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준 이번 장마는 고대부터 “물을 다스리는” “치수(治水)”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증명해 주고 있다. 고대부터 가뭄이나 장마 같은 천재지변은 군주가 부덕한 탓이라 여겼고 이를 잘 다스리는 자는 성군으로 불렸다.

조선시대 임금은 비를 내려달라고 비는 기우제나 올해처럼 입추가 지나도 비가 계속 올 때 비를 그치게 해달라고 비는 기청제(祈晴祭)를 한양의 사직단이나 도성 4대문에서 거행했다. 이렇게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따른 제사 이외에도 저수지를 축조한다거나, 기상관측을 위한 기구를 개발하는 등 치수를 위한 갖갖이 노력을 다한 것이 우리의 선조였다. 충북에도 이러한 흔적들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지방마다 문묘(文廟)와 사직단, 성황당(城隍堂), 여단(?壇) 등의 단묘(壇廟)를 설치하고 일정한 날짜에 제사를 올렸는데, 향교 내에 있는 문묘를 제외하고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었다. 흔히 말하는 종묘사직의 사직단의 위치는 `주례(周禮)'에 규정되어 있는데 `오른쪽에 사직, 왼쪽에 종묘'라 하여 왕이 거주하는 궁실을 중심으로 사직은 오른쪽에, 종묘는 왼쪽에 둔다는 뜻이며, 종묘는 왕이 있는 서울 한 곳에만 설치하는 데 반해 사직은 지방 행정단위인 주현에도 빠짐없이 설치하였으며, 그 위치는 관아의 서쪽, 곧 고을의 주요 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세웠다. 현재 전국적으로 남아 있는 사직단은 대구 노변동 사직단, 남원 사직단, 산청 단성 사직단, 창녕 사직단, 그리고 충북의 보은 회인 사직단 등 5곳뿐이다. 지역마다 행정명으로 사직동이 많이 남아 있는데 대부분 사직단이 위치했던 곳이라고 볼 수 있다. 청주시 사직동에도 옛 사직단 터가 남아 있다.

청주지역은 사직단 외에도 와우산(臥牛山), 부모산성의 모유정(母乳井), 상당산성 기우단에서 제물을 차려놓고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일반적으로 가뭄이 들면 청주목사가 읍성 서쪽 사직단에 제물을 차려놓고 기우제를 지냈고, 가뭄이 지속하면 청주의 진산(鎭山)인 와우산에서 산신에게 기우제를 지내고 청주옥에 갇힌 죄수를 석방하고 가난을 구제하기도 하였다.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는 부모산성이 주의 서쪽 15리에 있고 정상 부근에 있는 큰 연못 모유정이 있어 여기서 가뭄에 비 내리기를 빌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1671년(현종 12) 청주 목사를 지내던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이 지은 『청주상당산성기우제문』을 통해 당시 가뭄이 극심하여 상당산성 서문에서 북쪽 돌출부에 있는 기우단에서 기우제를 지낸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를 구분할 때 각각 호서(湖南), 호남(湖南), 영남(嶺南)지방이라고 명명하는데 여기서 기준이 되는 `호(湖)'는 각각 제천 의림지와 김제 벽골제이다. 두 곳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저수지로 고대에 축조되어 조선시대까지 주변 지역 치수의 중심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제천의 의림지는 현재까지 남아있어 지역을 대표하는 명소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충북에 남아 있는 치수의 흔적들은 시설이나 관측기구보다 제의와 관련된 유적이 많은 편이다. 자연의 위엄 앞에서 자신들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늘님에게 도움을 구했던, 한없이 겸손해야만 했던 선조의 모습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너무 자만하고는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