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반민특위
이승만과 반민특위
  • 정인영 사진가
  • 승인 2020.08.26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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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인영 사진가
정인영 사진가

 

8·15 광복은 일본 강점에서 벗어난 우리 민족에게 매우 중요한 역사다. 지난날의 역사를 교훈으로 삼아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민족의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알고 민주주의를 실현해 내는 것은 정의로운 국가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일본의 식민통치에 아부하고 그들의 손과 발이 되어 국가와 민족을 팔아먹고 자신의 이익과 영달을 위해 반민족적 행위를 한 친일 민족반역자들을 조사할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를 살펴보고자 한다.

당시 전 국민의 초미의 관심사항이었던 반민족행위특별법은 친일세력들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방해공작에도 국회에서 1948년 9월29일 김인식 의원 외 19명이 동의한 의안대로 표결에 부쳐 재석 145명 중 찬성 92명, 반대 1명으로 가결됐다.

이후 반민특위는 10명의 의원이 참여하는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반민특위가 구성한 10명의 위원으로는 인력이 부족해 반민족행위 특별조사기관 조직법안을 같은 해 10월28일 통과시켰다. 국회는 반민법을 집행할 특별재판관 15명과 특별검찰관 9명을 선임해 각 시·도 조사 체계까지 마련했다.

대부분의 국민은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지지한 반면, 친일세력들은 결사반대했다. 일제의 속박에서 해방된 지 3년여가 지난 그때까지 악질적 친일파들은 자신들을 처단하라는 국민의 부르짖음을 무시한 채 미국 군정 기관 구석구석에 들어앉아 애국자인 양 행세를 일삼았다.

그들은 그동안 일제의 보호 아래 모은 재력을 과시하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법제정에 앞장선 의원들을 공산당으로 몰아붙이면서 방해공작에 나섰다. 이들 친일세력은 반민법이 발효되고 반민특위가 활동을 시작할 때까지 그 법의 반대에 나섰으면서도, 국가에 새 바람을 일으키겠다는 반민법 지지세의 물결은 어쩌지 못했다. 그러나 변수가 생겼다.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된 이승만이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이승만은 자기의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고자 친일세력들을 무질서한 행정체계를 바로잡는다며 정부 요직에 기용한 것이다.

급기야 국회에서 정부 내 친일파를 숙청하라는 건의안이 통과되었다. 하지만, 이를 무시하다가 국회의 재촉이 심해지자 이에 반발한 정부와 국회의 충돌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후 반민특위에 대한 이승만의 견제는 특별담화를 발표하거나 반민특위 위원들에게 압력을 가하며 노골화되었다.

그는 1949년 1월 10일 반민특위 활동에 대한 담화에서 “부일 협력자가 친일하는 죄를 짓게 된 근본적 배경과 역사적 사실을 냉철하게 참고하지 않으면 공정하게 처리하기 어렵다”면서 “가혹한 처벌보다 관대한 편이 동족을 애호하는 도리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담화에 반민특위는 즉각 반발하면서 반민법 해당자에 대한 검거의 고삐를 늦추지 않아 오히려 친일파 검거에 더욱 힘을 쏟았다. 두 번째 담화를 발표한 이승만은 반민특위 활동에 반대하는 찬물을 끼얹었다. 반민특위에 대한 친일세력들은 악질왜경 출신들이 경찰 고위직에 있으면서 반민특위 위원과 애국자들에게 만행을 저지르면서, 특위요원 암살음모를 실행에 옮겼다.

헌법을 무시하고 반민법 시행을 고의로 방해한 이승만은 국민의 신뢰를 잃게 되었고, 권력에서 물러나는 실마리가 되었다. 당시 청산하지 못한 친일 논쟁은 광복 75년을 맞은 오늘도 여전히 한국사회의 딜레마가 되고 있음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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